- 야 있냐, 초랭이방정이라고 아냐?
종종 이런 사람들이 있다. 고향에서는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거주지를 이전하면서 그 믿음이 깨지는 경우. 마르(나)의 말버릇은 "야 있냐~"였다, 더 정확한 발음으로는 "야 잉냐". 말버릇이라는 건 무릇 본인이 인식하지 못하고 자주 쓰기 때문에 생긴다. 서울에 위치한 대학으로 입학한 나를 친구들이 장난으로 따라 하면서, 내가 새로운 화두를 던질 때 꼭 "야 있냐~"로 말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심지어 처음 애들이 "야 있냐~"하며 내게 말을 걸었을 때는, 그게 내 말투를 따라 하는 건지도 몰랐다. '저 친구가 무슨 말을 하려나 보군.' 정도로 이해했다. 이어서 그게 장난이란 걸 친구가 말해준 후에는 '이게 사투리라고? 그럼 서울말로는 뭐라고 하는데?'라는 게 나의 두 번째 반응이었다. 굳이 치환하자면 "있잖아."가 될 수 있겠지만, 굳이 잘 쓰는 표현은 아니라고.
이후 계속해서 서울에 살아가며, 나와 같이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타 지역 사람들의 서울말 적응기를 나도 몇 차례 목격했다. 대학 시절 또 다른 지역에서 살다 온 룸메이트에게는 "맞다 아니야-"라는 말버릇이 있었다. 그 귀여운 말씨는 나에게도, 그 친구의 전공 학과 친구들에게도 따라 하기 붐을 일으켰다. 한편, 앨리도 마르와 3-4년 정도의 텀을 두고 서울살이를 시작했다. 앨리에게도 비슷한 모먼트들이 있었고, 마르는 앨리의 말투나 억양이 변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물론 오랜 친구나 가족처럼 같은 말씨를 공유하는 이들을 만나면 본인도 모르게 원래 말씨가 되살아나는 것처럼, 마르와 앨리도 함께 살게 되며 그런 순간들을 마주한다. 앨리는 놀라면 순간적으로 "오↗메-"한다. 그제는 마르가 갑자기 흥이 올라 신나는 음악을 틀고 춤을 선보이자, "웬 초랭이방정이냐-!"하고 꾸짖었다. 오두방정의 방언인데, 이 말을 어릴 때 큰 이모에게 듣고 거의 처음 들어 말한 사람도 듣는 사람도 웃음이 터졌다. 마르가 왜 생전 쓰지도 않던 말을, 그것도 방언을 그렇게 찰지게 사용했냐고 묻자 앨리는 본인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 말이 나왔다고 답했다. 어릴 때 들은 말은 인이 박여 무의식 중에 되살아나는 건가?
마르나 앨리 모두 집 밖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이, 빠르게 출신 지역을 파악하지는 못할 정도로 말투나 억양이 변했다. 자연스럽게 고향 이야기가 나오면, 몰랐다는 반응이 더 많이 나올 만큼. 나에게 말버릇으로 장난을 걸었던 친구들에게 악의는 없었고, 나 역시 룸메이트의 특징적인 말투가 귀엽게만 느껴졌었다. 그러나 그 룸메이트 친구도 나도 그 표현들을 예전만큼 쓰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경우 사투리(혹은 방언이 아니더라도, 특정 지역에서 주로 쓰는 표현)를 계속 쓸지 말지 충분히 고민하고 판단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다름'을 인지하자 그때부터는 다름을 줄여가는 데에만 집중했던 것 같다. 내가 '틀렸다'라고 매 순간 생각하며 사투리를 고친 것은 아니지만, 그 표현을 쓰지 않으려 했던 내 행동에 은연중에 '틀렸다'는 마음, 다수와 '다르지 않아야겠다'는 마음이 스며들어 있었을까? 그렇다고 지금 다시 사투리나 억양을 되살리는 것은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의 말씨나 단어를 조금 생소하게 느끼고 또 그것이 좋은 의미로 흥미롭게 느껴지더라도 굳이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바로 표현하지는 않는 사람이 되려고 한다. 늘 노력해도 방심한 순간 놓치게 되는 것이 자기 검열이라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