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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떨고 있는겨? (1)

by 메이슨
(사진설명) 나이아가라에 있는 미국측 국경수비대의 게이트가 썰렁하게 닫혀있다. 평소에는 차가 꼬리를 물며 북적거리던 곳이다.


여행이 주는 즐거움은 크다.

나에게는 일상을 벗어나 심신에 산소를 주입시키는 중요한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바쁜 일상을 핑계 대며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참견을 하고 싶다.


‘여유가 있어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여행을 가니까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인티제(INTJ) 답게 평소에는 여유가 눈곱만큼도 없는 나지만, 어디든 국경을 넘을 때는 늘 happy camper가 된다.

아내는 어렸을 때 수학여행도 안 가봤느냐며 눈총을 주지만, 태어날 때부터 가슴에 호기심 엔진을 달고 태어난 나는 그 엔진을 끄는 방법을 여태껏 모른다.


여행은 싸돌아 다니는 것도 좋지만, 사전 계획을 짜는 시간이 어쩌면 엔톨핀이 가장 높게 치솟는 순간일 것이다. 가족들하고 해외여행이라도 가고자 할 때는 엔돌핀도 팍팍 올릴 겸해서 나름의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만, 로컬 여행은 일단 몸으로 부딪혀 보자는 주의였는데, 캐나다에 살면서는 그림이 바뀌었다.

이젠, 어디든 가려고 하면 모눈종이에 컴퍼스며 잣대를 대고 도안을 그리는 설계사의 시늉이라도 내야 한다.

날짜별로, 아니 시간별 계획까지 물어보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서이다.


한국에서는 해외여행이라 해봐야 패키지여행이 전부였고, 국내 여행은 그야말로 어디든 들이대어도 되었지만,

"여기서는 로컬이라 해도 말도 안 통하고 사람들도 무섭고 하니 해외여행이나 다름없다!"는 선언적 설교에 충복한 종이 되는 편을 택했다.

어겼다가는 생존을 위한 산소 여행이 아니라, 일상의 평안한 생존이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유럽으로 간다면 1밀리 방안지에 뾰족한 4H연필로, 기타 지역은 5밀리 정도의 방안지 위에 남이 그려 놓은 도면을 덧대는 정도의 자세면 된다.

유럽은 볼 것이 많은 만큼 비용도 비싸니 시간과 원가 관리를 잘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딱 한 군데는 아내도 인정하는 예외가 있다, 백지 한 장에 리조트 이름만 적어도 되는...!

그곳은 한 장소에서 야자수처럼 뿌리내리고 있다가 돌아오면 되는 캐러비안 나라들이다.

공항에 도착해서 리조트 이름만 대면 셔틀버스가 알아서 데려다 주니, 거기서 먹고 자고 마시고 놀고 그리고, 또 먹고 자고 마시고 놀다 오면 그만이다.




미국은 개인적으로 사업상으로 여러 번 넘어 다녀서 엔돌핀 올릴 일도 없고, 가슴 콩닥거리며 계획을 짤 필요도 없지만, 딱히 꼬집어 얘기하자면 5밀리 방안지에 4B 연필로 대충 그려도 되는 정도일 것이다. 그 연필 자국이란 것도 총알이 날아들 수 있는 위험한 지역만 꺼멓게 지우면 되는데…


그런데 요즘은 아니다.


입국 심사가 하도 까다로워져서, 미국 땅에 발을 들여놓기가 쉽지 않다(..고 얘기들을 한다).

원래 캐나다는 이웃이라 해서 소위 쯩(?)만 보여주면 무사통과였는데, 트럼프가 들어선 이후에는 미국 국경 넘는 것이 조선시대에 대궐 문 넘는 것만큼이나 까다로워졌다(..고 한다).

또 트럼프가 은근히 백인 우선주의를 표방하면서, 대놓고 중국을 배척하니 아시안들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캐나다 정부에서도 공식적으로 ‘여행 주의’ 경고를 내렸다, 자칫하다가는 캐나다 시민권자도 철창에 갇힐 수 있다고...


나는 애진작에 보스턴으로의 출장 계획이 잡혀 있었는지라, 이런 소식을 접할 때마다 가슴이 덜렁거렸다.

시간이 점점 다가올수록, 수년 전에 미국 국경을 넘으면서 겪었던 불쾌한 기억도 자꾸만 되살아 났다.

사실, 나한테 보스턴은 눈 감고 아웅 해도 될 만큼 준비 없이 방문해도 되는, 몇 안되는 미국 도시 중의 하나이다.

매년 3월이면 세계 최대의 씨푸드 쇼가 여기서 열리곤 하는데 벌써 10년 넘게 참석해 오고 있다.


또, 무엇보다도 큰 아들이 오랫동안 살았던 도시이다. 아내하고 먹을 것도 챙겨줄 겸, 살림살이도 도와줄 겸해서 자주 들락거렸다.


하지만, 6년 전인가? 토론토에 방문한 큰 아들을 데려다 줄 겸, 모처럼 가족 여행도 할 겸해서 보스턴으로 가던 중, 나이아가라에 있는 미국 국경을 넘다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진 적이 있다.


그때도 트럼프 집권기였다.


늦은 오후, 미니밴에 두 아들과 아내를 태우고 보스턴으로 향하는데, 그동안 수도 없이 잘 넘어갔던 검문소에서 제동이 걸렸다.

한눈에 봐도 까칠하게 생긴 젊은 경찰이 차를 저리 빼라고 손으로 가리킨다.

가리키는 손 따라서 차를 세웠더니, 다짜고짜로 “You, kill me?”하며 벌컥 화를 낸다.

차를 대는 순간 내 딴에는 친절하게 보여야겠다 싶어 차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는데, 그 바람에 핸들이 그 친구 쪽으로 약간 틀어졌었나 보다. 그 뒤로 따발총처럼 쏘아 대는 몇 마디가 들렸는데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대화소통에 문제가 있다면서 시비를 건다. I.N.T.JJ(Judging)가 마비되는 순간이었다.


평소에도 국경 통관용 영어 4종 세트는 익히 알고 미리 미리 답을 준비하고 있지만, 그 이외의 질문은 잘 들리지 않는다는 한계가 있다.


1. 어디를 가느냐? 2. 무엇하러 가느냐? 3. 얼마동안 있을 거냐? 4. 어디서 묵을 거냐?


순서도 거의 똑같은 뻔한 질문과 답이 수도 없이 오고 가는 곳이다 보니, 국경 경찰들의 발음도 된장찌개 위 두부 기름처럼 납작하니 겉돈다.


당황해하는 아빠를 돕기 위해서 조수석에 있던 큰아들이 나섰다.

유창한 영어로 사과와 해명을 하니, 제서야 차를 주차장에 대고 사무실로 들어가라고 한다. 별도의 조사를 받으라는 얘기이다.

한눈에 봐도 가족이고 그리고 그 중 셋이나 쯩으로 캐나다 시민권을 보여주었으면(나는 캐나다 영주권자이다. 한국국적을 고집하는 INTJ인지라), 승차한 그대로 통과시켜 주는 것이 관례다.

물론, 영주권자는 수비대 사무실에서 별도의 통관수속을 밟아야 하는 것은 맞다. 원칙은 그렇지만, 시민권자와 동행하는 경우, 특히 가족이 시민권자인 경우는 거의 다 같이 묻어서 패스시켜준다.


하지만, 오늘 이 친구는 아니다!


어두컴컴한 주차장에서 바닥에 써놓은 지정 번호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또 잔소리를 들을까 염려하여 라인에 딱 맞추어 차를 대는 동안, 나는 이미 I.N.t.j 상태가 되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니 사무실의 문이 꽤 멀리 보인다. 주차장이 텅 비어 있는데도, 내게 준 지정 번호는 주차장의 끝이었다.


이제, 세명의 캐나다 시민권자가 굳은 표정으로 나를 호위(?)하고, 미국측 국경 수비대의 철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 지금 떨고 있는겨?”




(국경수비대 사무실에서 있었던, 그리 아름답지 않은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얘기하겠습니다.)


메이슨에세이스트


캐나다에 살며, 영어의 밍글거림 보다 한글의 바삭거리는 맛을 좋아합니다. 하얀 얼굴의 상냥함보다 투박한 우리네의 속 깊은 정을 그리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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