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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에서 만난 말 가족

by 백승인 Feb 04. 2025

제주의 올레는 걷는 이에게 선물 같은 풍경을 내어준다. 그중에서도 14-1코스는 자연의 깊숙한 속살을 마주하는 길이다. 13코스의 끝자락이자 14코스의 시작점인 저지오름 근처에서 출발해 저지곶자왈을 지나 무릉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숲과 오름, 그리고 목장과 오설록 뮤지엄이 어우러진다.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적한 포장도로를 따라 걸었다. 길 한복판에서 나를 멈춰 세운 건 뜻밖의 작은 생명체였다. 그곳에는 키가 중지 손가락만 한 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흔히 보는 풀이나 잡초가 아니었다. 분명히 나무였다. 시멘트 도로의 일부가 패인 곳,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을 틈새에서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모습이 마치 ‘나는 살아있다’고 외치는 듯했다. 수많은 차가 지나다녔을 텐데도 살아남은 생명력에 감탄하며 한참을 내려다봤다. 이 작은 나무의 끈질긴 생명력은 걸음을 옮기는 내내 마음에 남았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곶자왈에 들어서면 세상의 소리가 줄어든다.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 햇빛조차 쉽사리 들어오지 않는다. 휴대전화 신호는 물론, 사람의 흔적도 찾기 어렵다. 마치 다른 시간대에 들어온 것처럼 고요한 숲길을 걸으며 나는 자연의 품속에 있다는 걸 실감했다.     


곶자왈을 지나 문도지오름에 오르니 탁 트인 시야로 가슴이 후련해졌다. 오름을 넘어서자 숲길이 이어졌다. 사유지인 목장 지역이라는데, 숲길은 마치 초록 터널 같아 두 사람이 겨우 나란히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숲의 숨결을 느끼며 걷는데, 저 앞에서 말 한 무리가 보였다. 뒤엉켜 있는데 얼핏 봐도 크기가 달랐다. 두 마리는 컸고, 두 마리는 작았다. 차츰차츰 가까워졌다. 조심스러운 마음에 우리가 길 한쪽으로 비켜섰다.  

   

말들은 우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무리 지어 오다가 자연스럽게 큰 말 한 마리가 앞으로 나섰다. 그 뒤를 이어 망아지, 망아지, 큰 말이 천천히 따랐다. 말들이 지나가는 동안 아내와 나는 숨을 죽였다. 말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장벽도 없었지만, 서로를 향한 신뢰와 이해가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말들이 우리를 지나쳐 가자마자 나와 아내는 동시에 “우와”하고 감탄했다. 하마터면 손을 흔들어 잘 가라고 인사할 뻔했다.  

   

아내가 말했다. “저 앞에 가는 말이 아빠일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뒤에 있는 건 엄마겠지.”     

우리가 짐작한 것이 정확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부모가 앞뒤에서 자식을 감싸며 보호하는 모습은 말이나 사람이나 다를 바 없었다. 보호받는 어린 새끼들은 아빠와 엄마 사이에서 안전해 보였다.     


짧은 엇갈림이었지만, 그 순간의 떨림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자연 속에서 마주한 생명의 힘과 가족의 사랑, 그리고 그 안에서 느낀 평온함이 우리 부부를 어루만졌다. 올레에서 만난 말 가족은 내 마음 한편에 작은 나무처럼 뿌리를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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