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는 영화평론가 정성일 선생이 함께 했다. 정영음의 고정 패널로서 은임이 누나의 영화 친구. 다큐 상영이 끝난 뒤 “솔직히 힘들다”고 심경을 토로하던 그가 털어놓은 정은임 혹은 정영음. (때론 정확하지 않은 멘트가 있을 수도 있음.)
“(이 다큐는) 처음 봤는데 찍혀진 것은 사고 전이다. 정영음이라는 프로그램은 흔히 아는 라디오프로그램과 달랐다. 당시 4대 통신을 통한 연대, 새로운 코뮌을 만들 수 있지 않나하는 기대도 있었고, 좋은 세상을 믿는 사람들의 약속 같은 거 아니었나 싶다... 정은임씨는 항상 Hot한 사람이었다. Cool한 태도를 경멸했고 Cool이란 단어를 싫어했다...
다큐를 보면서 생각나는 건, 1992년부터 시작한 정영음은 본인이 제일 열심히 하고 아끼며 최선을 다했던 프로였다. 시간과 갖은 노력을 다 들였다. 라디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대부분 앵무새인데 정은임씨는 달랐다.
특히 라디오방송이어서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화를 설명하는 코너가 있었다. 많은 청취자들이 없애자는 코너였다. 없애자는 엽서도 많이 왔고. 정은임씨는 엽서가 오면 다 읽었다. 예쁜 박스에 넣고. 악랄할 엽서도 굉장히 많았다. (이런 엽서를 보면) 힘들어했고 울기도 했다.
하지만 그 코너를 없애는 것은 내 눈을 빼앗은 것 같다고 말하면서 그 코너를 지켰다. 그래서 (그 코너는) 없어지지 않았다. 당시 PD를 맡고 있던 홍동식 PD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라디오 방송에서 절대적 방송권은 PD가 갖고 있다.
나는 굉장히 감동했다. (정은임씨는) 여차저차 TV에 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고 라디오를 해야 했었고, 입사하자마자 영화음악실을 맡았다. 사실 새벽 1~2시 프로그램은 입시생, 고시준비생 아니면 잘 듣지 않는다. 직장인들은 다음날 회사 출근할 것을 생각하면 12시에 자야한다.
한번은 (정은임씨에게) 내가 받은 비수 같은 엽서를 보여주기도 했다. 제대해서 (정영음을) 처음 들었다는 그 사람은 MBC 주파수와 교육방송 주파수가 바뀐 줄 알았다고 했다. 내용도 어렵고 센 발언도 많고.. 그런데 사실 이렇게 지지자들이 많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
영상을 보면서 이 사람의 마음을 생각해 봤다. 훌륭하다고 생각한 특히 나이 어린 사람이 떠나면 참 힘들어진다. 사는 게 덤처럼 느껴진다. 고인이 된 뒤 식장에 도착했더니 그 무덥고 화창했던 날씨가 비가 쏟아 붓고 있었다. 거기 있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했다.
정은임씨는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착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좋은 세상에 대한 신념이 있었고 그것보다 더 큰 신념을 갖고 행동했던 사람이다. 곁에 있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만날 수록, 과장 없이, 향이 느껴지고 깊어지는 사람이다. 이건 고인이어서가 아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가도 갈수록 시들해지고 맛이 가는 경우가 많은데 정은임씨는 달랐다. 그래서 (정은임씨는) 살아가면서 몇 되지 않은 멋진 만남이었다.
정은임이라는 사람을 죽이지 않는 건 기억하는 것이다. 잊으면 정말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는 것이다. 단지 기억하지 말고 한 사람 한 사람 다 정은임 같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 향을 낼 수 있는, 나눠줄 수 있는. 어린 사람이지만 많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