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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전쟁연의] 5. 삼국연합, 고구려를 막아라

고구려의 경주진공작전과 삼국연합 방어전

by cm

지난 연재에서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으로 백제의 수도 한성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왕자 문주를 비롯한 몇몇 인물들이 지금의 공주, 웅진으로 도망가서 국가를 유지합니다. 백제 한성을 무너뜨린 고구려의 공격은 5년 후인 480년 신라에게도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말갈의 신라 습격과 소지 마립간의 순행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무너뜨리고 백제를 추가로 공격하거나 신라를 공격하지 않고 철수합니다. 고구려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한 이유에는 여러 학설이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학설은 북위, 물길 등 중국 지역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저도 동의하는 학설이고요. 이후 고구려는 북위에 꾸준히 사신을 보내면서 외교 관계를 다집니다. 그리고 480년에 신라를 대상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十一月, 靺鞨侵北邊.

(480) 11월에 말갈이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三年, 春二月, 幸比列城, 存撫軍士, 賜征袍.

3년(481) 봄 2월에 비열성에 행차하여 군사들을 위로하고 군복을 내려 주었다.


신라의 소지 마립간 2년(480)에 말갈이 신라를 공격합니다. 제가 3편 연재에서 다루었듯이 당시 말갈은 468년에 고구려와 함께 신라의 실직성을 공격했습니다. 당시 고구려의 명에 따라서 군대를 동원하던 세력이었습니다. 즉 고구려의 군사 활동 속에 말갈의 군사 활동도 포함되는 것이죠. 당시 말갈이 왜 고구려의 세력에 포함되었는가? 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많은 견해가 분분하고 굉장히 어려운 주제입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여러분이 교과서에서 배웠던 옥저, 동예라는 강원도 쪽에 있던 옛날 국가들이 있습니다. 이 국가에서 살던 사람들이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말갈이라고 통칭되어 『삼국사기』에서 불린 것이죠. 그렇다면 말갈이 공격했다는 북쪽 변경은 어디일까요? 추정해 볼 수 있는 내용이 제가 두 번째로 인용해 둔 기사입니다.


말갈의 공격을 받고 바로 3달 뒤에 신라의 소지 마립간이 비열성으로 행차해서 군사들을 위로해 줍니다. 비열성은 지금의 강원도 안변입니다. 통일전망대가 있는 고성 위에 있는 지역으로 지금은 북한땅이죠. 신라가 고성보다 더 위에 지역을 통치했다고?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신라는 강원도의 전체를 점령하고 있던 것이 아닙니다. 제가 3편에서 적었듯이 강릉, 삼척 같은 동해안의 중요한 곳들을 거점단위로 지배하던 방식이었습니다. 해안가를 통해서 왔다 갔다 할 수만 있으면 북쪽으로 많이 올라가도 그렇구나~ 할 수 있는 것이죠.


이 비열성을 말갈 공격이 있었던 3달 후에 순행을 했다? 충분히 연관성이 있어 보이죠. 제 추측이지만 말갈이 비열성 부근을 공격하자 신라는 고구려에서 비열성 쪽을 공격해 오겠구나!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왕이 직접 비열성을 가서 군사들을 위로하고 방어체계도 살펴보았겠죠. 하지만 고구려의 공격 루트는 다른 곳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경주진공작전과 미질부전투


소지 마립간이 비열성을 순행하고 바로 다음 달에 고구려가 드디어 신라를 공격합니다. 다음 기사를 보겠습니다.


三月, 髙句麗與靺鞨入北邊, 取狐鳴等七城, 又進軍於彌秩夫. 我軍與百濟·加耶援兵, 分道禦之, 賊敗退. 追擊破之泥河西, 斬首千餘級.

3월에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북쪽 변경에 쳐들어와 호명성 등 7성을 빼앗고, 또한 미질부로 진군하였다. 우리 군사는 백제·가야의 구원병과 함께 길을 나누어 막으니 적이 패하여 물러갔다. 이하 서쪽까지 추격해 물리치고 1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고구려가 빼앗았다는 호명성은 지금의 청송, 영덕으로 학설이 나눕니다. 저는 당시 고구려가 동해안을 따라서 진출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덕으로 판단합니다. 미질부가 지금의 포항 흥해읍인데 청송보다는 영덕에서 진출하는 것이 교통로상으로 더 편하다고도 판단하고요. 그런데 포항 흥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 바로 근처입니다.


고구려군이 신라의 수도 바로 앞까지 쳐들어온 것이죠. 이거 완전 475년 백제 한성을 공격한 것과 비슷하죠? 네, 당시 고구려는 475년의 경험을 살려서 신라도 수도인 경주로 진공 하려고 했던 것이죠. 문제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겁니다.

브런치 정선, 흥해.JPG 정선->흥해까지 교통로

위의 지도는 정선->흥해까지 차로 이동했을 때에 거리입니다. 250km 정도 되는 거리입니다. 옛날 군대가 이동하는 하루거리를 12km라고 하는데 20일이 넘게 걸리는 거리입니다. 신라가 고구려의 공격을 알아채고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죠. 때문에 신라는 경주의 바로 앞! 포항의 미질부에서 백제와 가야 연합군과 고구려를 막아서는 데에 성공합니다.


고구려 입장에서는 경주로 들이닥쳐야 하는데 코 앞에서 막히고 말았죠. 게다가 너무 깊숙하게 들어왔죠. 보급에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엔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너무 깊게 들어온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습니다. 1천여 명이 사망을 했다면 부상자는 그보다 더 많았을 겁니다. 최소 3000명 정도의 군사 피해를 고구려가 당했던 것이죠.


이 전투 이후에 고구려는 강원도가 아닌 다른 지역으로 전쟁 지역을 옮겨가려는 시도를 합니다. 비슷한 시기에 신라는 강원도 지역에 산성을 축성하면서 군사 거점을 마련하려는 모습을 보이죠.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편에서는 변해가는 삼국의 전쟁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표지 사진: 남미질부성: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659193&cid=46618&categoryId=46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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