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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전쟁연의] 3. 고구려의 분노, 실직성을 부숴라

고구려의 실직성 습격과 신라의 남한강 방어 시작

by cm Feb 17. 2025

 네, 드디어 오늘 연재부터 삼국전쟁을 본격적으로 서술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연재에서는 본격적으로 변화하기 시작하는 삼국의 관계와 전쟁의 시발점이 되는 고구려의 실직성 습격을 서술하겠습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고구려의 중국 외교와 신라 공격 지연

 지난 연재글에서 신라의 자비 마립간이 신라 영역 내의 고구려 세력을 완전히 축출했다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고구려로서는 신라를 도저히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구려의 군인 100명이 사망하고 종속국이라고 생각했던 신라가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죠. 더군다나 450년을 시작으로 신라는 노골적으로 백제와 동맹을 맺고 군사 지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실제로 군사를 일으켜서 신라를 공격한 것은 464년에서 4년이 지난 468년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제가 1화에서 연재한 보여줬던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 이후 장수왕의 태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464년에 고구려 군사들이 살해당한 바로 직후에 신라를 공격하지 않은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이유는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연구자들의 추정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시기에 고구려가 중국과의 관계에 집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밑의 사료들을 한 번 보겠습니다.


 五十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50년(462) 봄 3월에 사신을 보내 위에 가서 조공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6 장수왕 50년(462) 3월)


 五十一年, 宋 世祖 孝武皇帝䇿王為車騎大将軍·開府儀同三司.

 51년(463)에 송의 세조 효무황제가 왕을 책립 하여 거기대장군 개부의동삼사로 삼았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6 장수왕 51년(463))


 五十三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3년(465)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위에 가서 조공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6 장수왕 53년(465) 2월)


 五十四年, 春三月, 遣使入魏朝貢. 魏 文明大后, 以顯祖六宫未備, 教王令薦其女. (중 략) 王遂上書, 稱女死. 

 魏疑其矯詐, 又遣假散騎常侍程駿, 切責之, “若女審死者, 聽更選宗淑.” 王云, “若天子恕其前愆, 謹當奉詔.” 㑹顯祖崩, 乃止.

 54년(466) 봄 3월에 사신을 보내 위에 가서 조공하였다. 위의 문명태후가 현조의 육궁이 갖추어지지 않았다 하여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중 략) 왕이 드디어 글을 올려 그 여자가 죽었다고 핑계를 대었다. 

 위는 거짓이라고 의심하며 다시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 심하게 질책하며, “만약 여자가 죽은 것이 명확하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골라서 보내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만약 천자께서 그 전의 허물을 용서하신다면, 삼가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현조가 사망하여 이에 그만두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6 장수왕 54년(466) 3월)


 五十五年, 春二月, 遣使入魏朝貢.

 55년(467) 봄 2월에 사신을 보내 위에 가서 조공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6 장수왕 55년(467) 2월)


 위의 사료들을 보면 고구려는 462~467년까지 중국, 특히 북위와 끊임없이 교류합니다. 466년에는 북위에서 혼인동맹을 요청하지만 거절하기도 했고요. 이 시기의 북위와 고구려에 교류에 대해서 많은 견해가 있습니다. 다만 내용이 너무 어려워지니 간단히만 쓰겠습니다. 북위 내부의 정치에 고구려를 이용,  송-유연-고구려의 연합을 허물기 위함, 고구려와의 대립 해소 목적 등의 견해가 있습니다. 어쨌든 당시 고구려는 북위와의 관계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고구려의 신라 보복은 어느 정도 지체되게 됩니다.



 고구려의 실직성 습격

 468년 드디어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합니다. 이 전쟁에 대한 사료도 살펴보겠습니다.


 十一年, 春, 髙句麗與靺鞨襲北邊悉直城.

 11년(468) 봄에 고구려가 말갈과 더불어 북쪽 변경의 실직성(悉直城)을 습격하였다.(『삼국사기』신라본기 3 자비 마립간 11년(468) 봄)


 五十六年, 春二月, 王以靺鞨兵一萬, 攻取新羅悉直州城.

 56년(468) 봄 2월에 왕이 말갈(靺鞨) 병력 10,000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하여 빼앗았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 6 장수왕 56년(468) 2월)


 468년 고구려가 신라의 실직성을 공격합니다. 무려 1만 명이라는 병력이었죠. 그 시대의 인구수를 생각하면 굉장한 대군이죠! 실직성은 지금의 강원도 삼척군인데요, 그렇다면 고구려는 왜 대군을 일으켜서 실직성을 공격했을까요? 이것과 관련해서는 다음 지도를 보겠습니다.

강릉-삼척 일대의 신라 유적

 위의 지도는 제가 구글어스에 직접 찍어둔 강릉-삼척 일대의 신라 유적입니다. 오화리산성이라고 적힌 곳이 현재 실직성으로 연구자들이 추측하고 있는 곳이죠. 앞서 1,2화에 나왔던 하슬라는 강문통 토성터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삼척 밑으로 울진->영덕->포항->경주로 갈 수 있기에 신라의 왕경과 이어지는 교통로죠. 여기서 고구려가 실직성을 공격해서 점령하면 어떻게 될까요? 신라의 하슬라와 왕경을 잇는 육로가 끊기게 되는 상황이 나오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신라의 하슬라도 위기 상황에 빠지게 되겠죠. 신라는 동해안 영역에서 거점들을 잃어버리는 상황이 펼쳐지는 겁니다. 이러한 전략적 상황을 고려해서 고구려가 실직성을 습격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말갈군을 동원했습니다. 여기서 말갈은 여러분들이 주로 아시는 말 타고 다니는 유목민들이 아니라 지금의 강원도 영서지역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을 통칭하는 용어였다고 연구자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을 잘 알고 있던 말갈군을 이용해서 지도에 있는 백복령과 같은 골짜기 길로 실직성을 습격한 것이죠.


 다만, 이후에 고구려군은 전략적 문제 때문인지 추가적인 공격을 이어가지 않습니다. 고구려의 추가 공격이 없는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가 각각 활동을 시작합니다.


 秋九月, 徵何瑟羅人年十五已上, 築城於泥河(泥河一名泥川).

 가을 9월에 하슬라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인 자를 징발하여 이하에 성을 쌓았다(이하는 일명 이천이라고도 하였다).(『삼국사기』신라본기 3 자비 마립간 11년(468) 9월)


 十五年, 秋八月, 遣將侵髙句麗南鄙.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삼국사기』백제본기 3 개로왕 15년(469) 8월)


 신라는 고구려의 공격을 받고 약 4~5개월이 지난 후, 이하에 성을 쌓습니다. 이하성은 제가 지도에 표시한 송계리산성으로 현재 추정하고 있죠. 강릉, 삼척으로 가는 삽당령, 백복령을 모두 감시할 수 있는 지역에 축성을 했습니다. 이후 신라는 이하성 축조를 시작으로 축성을 열심히 하면서 방어체계를 구축해 갑니다.


 백제는 개로왕이 즉위하고 무려 15년 만에 활동을 시작합니다. 고구려의 남쪽을 공격하죠. 시기상으로는 차이가 조금 있지만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하면서 동쪽으로 시선이 몰린 점+북위에 계속 사신을 보내면서 신경 쓰고 있던 틈을 노린 공격이 아닐까 합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북위를 신경 써야 하는데 백제는 침략을 하고 신라는 야금야금 방어체계를 만들고 있는 상황인 거죠. 큰 결단이 필요한 대외 정세였을 겁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백제가 큰 사건을 일으킵니다. 결국 이게 계기가 되어서 고구려의 장수왕은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게 됩니다. 무슨 사건이냐고요? 


그건 다음 연재에서!


표지 사진: 오화리 산성이 있는 삼척 고성산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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