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킷 29 댓글 공유 작가의 글을 SNS에 공유해보세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삼국전쟁연의] 1. 고구려 장수를 죽여라

하슬라성주 삼직의 고구려변장 습격

by cm Feb 10. 2025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은 삼국시대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많은 분들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이 있었다는 것과 광개토왕, 근초고왕, 진흥왕 같은 유명한 왕들에 대해서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계속해서 전쟁을 하고 치열하게 싸우다가 신라에 의해서 통일을 했다는 사실도 많이들 아실 겁니다.


 그렇다면 삼국의 전쟁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근초고왕대 백제의 대외진출시기? 고구려 광개토왕의 정복전쟁 때? 신라 진흥왕이 한강을 점령했을 때? 모두 아닙니다! 고구려와 백제,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운 적은 예전부터 있지만 삼국이 같은 시기, 같은 공간에 전쟁을 참여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신라 눌지마립간대부터입니다. 


 그래서 저는 눌지 마립간대부터 연재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한국 고대의 전쟁을 전공하는 역사학도로서 여러분께 최대한 쉽게 삼국의 전쟁에 대해서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목도 삼국전쟁을 최대한 쉽게 설명한다는 의미에서 삼국전쟁연의로 지었습니다.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삼직의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

 450년 가을, 신라의 눌지 마립간은 매우 초조한 상태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눌지 마립간이 기다리던 인물이 경주에 도착했습니다. 바로 고구려군에게 다녀온 신라 사신이었습니다. 눌지 마립간은 어째서 신라 사신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시간을 조금만 앞으로 돌려보겠습니다.


 같은 해 7월, 신라의 하슬라(지금의 강릉) 지역은 폭풍전야였습니다. 하슬라성 성주 삼직은 자신 휘하의 부하들을 모은 상황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하슬라 남쪽의 실직(지금의 삼척)에서 사냥을 하고 있던 고구려의 장수 때문이었습니다. 삼직은 이 고구려의 장수를 습격해서 죽이기 위해 자신의 부하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삼직은 실제로 이 일을 행동에 옮겨 고구려의 장수를 죽였습니다.


사진 1. 삼직이 성주로 있었던 하슬라성으로 추측하는 강릉 강문동일대사진 1. 삼직이 성주로 있었던 하슬라성으로 추측하는 강릉 강문동일대
사진 2. 강릉 강문동에서 발견된 신라 건물지 발굴 현장사진 2. 강릉 강문동에서 발견된 신라 건물지 발굴 현장


 450년대 신라는 고구려에게 크게 휘둘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눌지 마립간의 전전대 마립간이었던 나물 마립간대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군대를 이끌고 신라에 침입한 왜적을 격퇴해 주면서 고구려는 신라의 정치상황에 크게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신라는 고구려에 볼모로 갔던 왕족인 실성, 눌지가 연속해서 마립간이 되었습니다. 고구려와 연관이 있는 인물들이 왕위를 이었다는 점은 고구려가 신라의 정치구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이었기에 삼직의 행동은 정말 큰 결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삼직은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사실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의 영향으로 마립간이 되었지만 고구려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습니다. 눌지 마립간의 이런 노력은 『삼국사기』 여기저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及訥祇王即位, 思得辯士, 徃迎之. 聞水酒村千 伐寳靺·一利村干 仇里迺·利伊村干 波老 三人有賢智. 召問曰, “吾弟二人, 質於倭·麗二國, 多年不還. 兄弟之故, 思念不能自止. 願使生還, 若之何而可.” 三人同對曰, “臣等聞歃良州千堤上, 剛勇而有謀, 可得以解殿下之憂.”

 於是, 徴堤上使前, 告三臣之言而請行. 堤上對曰, “臣雖愚不肖, 敢不唯命柢承.” 遂以聘禮入髙句麗, 語王曰,  (중 략)  王曰, “諾.” 許與同歸.

 눌지왕이 즉위함에 이르러, 말 잘하는 사람을 구해가서 그들을 맞이해 올 것을 생각하였다. 수주촌간 벌보말, 일리촌간 구리네, 이이촌간 파로 세 사람이 현명하고 지혜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러 물어 말하기를 “나의 두 아우가 왜와 고구려 두 나라에 볼모로 가서 여러 해가 지났으나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형제 사이이기 때문에 그리운 생각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다.

 세 사람이 다 함께 말하기를, “신들은 삽량주간 제상이 강직하고 용맹하며 지모가 있다고 들었으니, 가히 전하의 근심을 풀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제상을 불러 앞으로 나오게 하여, 세 신하의 말을 일러주고 가주기를 청하였다. 제상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신(臣)이 비록 어리석고 못났으나 감히 명을 삼가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마침내 교빙의 예를 갖추어 고구려로 들어가, 왕에게 말하기를  (중 략)  왕이 말하기를, “좋다”라고 말하고, 함께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삼국사기』열전5 박제상전)


 秋七月, 百濟遣使請和, 從之.

 가을 7월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하므로 이에 따랐다.(『삼국사기』신라본기3 눌지 마립간 17년(433))


 위에 두 기록을 살펴보면, 눌지 마립간은 고구려에 인질로 보낸 자기 동생을 데려옵니다. 또한 백제의 화친 요청에 응해서 403년 백제의 침공 이후 30년간 끊겼던 두나라 사이의 관계를 다시 잇습니다. 고구려에 잡힌 약점을 해결하면서 백제와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외교관계를 구축하는 시도를 했던 것이죠. 왕이 이러한 정치적 입장을 보였으니 신라인들 사이에서도 고구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겠죠. 


 저의 예상이지만 삼직도 이런 인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런 삼직의 입장에서 신라의 중요 지역이었던 하슬라 바로 밑에서 사냥을 핑계로 군대를 이끌고 다니던 고구려 장수가 아니꼬왔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결국 삼직은 고구려의 장수를 살해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습니다. 장수가 살해당한 고구려에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죠! 고구려의 장수왕은 신라에 항의하는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군대를 일으켜서 신라를 침공합니다. 이에 화들짝 놀란 눌지 마립간은 사신을 보내서 고구려에 사죄를 합니다. 앞서 저의 상상 속에서 눌지마립간이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고구려로 보냈던 이 사신이었습니다. 신라 입장에서는 다행히 신라왕의 사죄를 들은 장수왕과 고구려군은 다시 철수하였습니다. 해당 사건에 대한 기록이 역시 『삼국사기』에 상세히 나와있습니다.


 三十四年, 秋七月, 髙句麗邊將獵於悉直之原, 何瑟羅城主三直出兵, 掩殺之. 麗王聞之怒, 使來告曰, “孤與大王修好至歡也, 今出兵殺我邊將, 是何義耶.” 乃興師侵我西邊. 王卑辝謝之, 乃歸.

 34년 가을 7월에 고구려의 변방 장수가 실직의 들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하슬라성의 성주 삼직이 군사를 내어 갑자기 공격하여 그를 죽였다. 고구려왕이 그것을 듣고 노하여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내가 대왕과 더불어 우호를 닦아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었는데, 지금 군사를 내어 우리의 변방 장수를 죽였으니 무슨 의미인가?”라고 하였다. 이에 군사를 일으켜 우리의 서쪽 변경을 침범하였다. 왕이 겸허한 말로 사과하자 곧 물러갔다.(『삼국사기』신라본기3 눌지 마립간 34년(450))


 눌지 마립간의 즉각적인 대응으로 고구려군은 신라를 더 이상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미 양국 사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을 기점으로 고구려는 신라를 침입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글에서는 450년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에 대해서 『삼국사기』 기록과 더불어 『일본서기』를 참조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사진 출처

커버 이미지 및 사진 1(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5780779)

사진 2(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277/0002833508)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