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백제 한성 침공과 신라의 구원시도
지난 연재에서 고구려가 드디어 신라의 실직성을 공격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후 15년 만에 대외활동을 시작한 백제와 성을 축성하면서 야금야금 영역을 넓혀가는 신라의 모습도 보았지요. 그리고 고구려 장수왕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사건을 백제가 터뜨렸다고 했었죠? 무슨 사건인지 지금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469년 8월에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공격한 개로왕은 같은 해 10월에 쌍현성 수리, 청목령 목책 설립을 하면서 방어체계를 돈독히 합니다. 두 달 전에 공격했던 고구려의 보복을 대비한 행동이었겠죠? 하지만 고구려는 앞서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백제를 공격하지는 못합니다.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북위와의 관계가 문제였습니다.
고구려는 470년 2월에 북위에 또 한 번 조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에 노구(奴久)라는 인물을 대표로 하는 약간의 백성들이 북위로 도망가서 투항하였습니다. 북위에서는 이들에게 땅과 집을 주면서 살 수 있게 해주죠. 고구려 입장에서는 정말 부글부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그리고 드디어! 고구려의 분노를 터뜨리는 사건이 펼쳐집니다. 다음 사료를 통해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十八年, 遣使朝魏, 上表曰, “臣立國東極, 犲狼隔路, 雖世承靈化, 莫由奉藩. (중 략) 又云, “臣與髙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軽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又云, “今璉有罪, 國自魚肉, 大臣彊族, 戮殺無已. 罪盈惡積, 民庶崩離. 是滅之期, 假手之秋也. 且馬族士馬, 有鳥畜之戀, 樂浪諸郡, 懐首丘之心, 天威一舉, 有征無戰.
18년(472)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알하고 표문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이 동쪽 끝에 나라를 세웠는데, 승냥이와 이리가 길을 막으니, 비록 대대로 영험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국의 예를 받들 수 없었습니다. ( 중 략) 또 말하기를 “신은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기에 선대에는 예전의 우의를 돈독하게 유지하였으나 그 조상인 쇠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볍게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이끌고 신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 중 략)
또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지금 연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 대신과 힘센 귀족들을 살육하기를 그치지 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였으며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적기요, 손을 빌려야 할 때입니다. 또 풍씨 일족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이 있고, 낙랑의 여러 군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을 한번 일으키신다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전쟁은 없을 것입니다.
위의 사료는 백제가 북위에 사신을 보내면서 보낸 문서의 내용을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사용된 단어나 이런 것들이 어려운데 간단하게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1. 고구려가 백제를 괴롭혀서 북위에 조공하기가 힘들다.
2. 고구려와는 예전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신의를 어기고 우리를 공격했다.
3. 지금 고구려의 상황이 안 좋으니 북위가 공격하면 전쟁 없이 정벌할 수 있다.
네, 고구려를 공격하라고 북위한테 사주를 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북위에서는 백제를 옹호하고 고구려를 혼내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사신에게 챙겨주고 백제로 보냅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해안을 지날 때, 고구려가 북위의 사신들을 막고 백제로 가지 못하게 합니다. 이후에도 백제는 북위에게 고구려를 정복해 달라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냈지만 결국 북위는 군대를 보내지 않았죠. 결국 백제는 북위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반면에 고구려는 472년부터 475년까지 꾸준하게 북위에 사신을 연 2회씩 보냅니다. 고구려가 북위와의 외교전에서 백제에게 승리했다는 의미이죠. 그렇다고 고구려가 백제를 용서할리가 없겠죠? 469년 공격에 이어서 북위에게 침공을 사주했으니깐요.
그리고 475년 마침내!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공격합니다. 고구려는 엄청난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침공합니다. 백제의 관방체계가 순식간에 무너진 것인지 작동하지 않은 것인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고구려군은 백제 한성으로 곧바로 들이닥칩니다.
二十一年, 秋九月, 麗王巨璉帥兵三萬, 來圍王都漢城. 王閉城門, 不能出戰, 麗人分兵爲四道夾攻, 又乗風縱火, 焚燒城門. 人心危懼, 或有欲出降者. 王窘不知所圖, 領數十騎, 出門西走, 麗人追而害之.
至是, 髙句麗對盧 齊于·再曽桀婁·古尓萬年 再曽·古尓皆複姓.等帥兵, 來攻北城, 七日而拔之, 移攻南城, 城中危恐. 王出逃, 麗將桀婁等見王, 下馬拜已, 向王面三唾之, 乃數其罪, 縛送於阿且城下, 戕之.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이 군사 30,000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 나가 싸우지 못하니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누어 협공하고, 또한 바람을 타고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사람들의 마음이 매우 두려워하여 나가서 항복하려는 자들도 있었다. 왕은 군색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니 고구려 사람이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중 략)
이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 제우·재증걸루·고이만년(재증과 고이는 모두 두 글자로 된 성이다.)등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북성을 공격하여 7일 만에 빼앗고 옮겨서 남성을 공격하니 성 안에서는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왕이 나가서 도망하자 고구려 장수인 걸루 등이 왕을 보고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나열한 다음 포박하여 아차성 아래로 보내 죽였다.
秋七月, 髙句麗王 巨連 親率兵, 攻百濟. 百濟王 慶 遣子文周求援. 王出兵救之, 未至百濟已䧟, 慶亦被害.
가을 7월에 고구려왕 거련이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 경이 아들 문주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다. 왕이 군사를 내어 구해주려고 하였으나 미처 도착하기 전에 백제가 이미 함락되었고 경 또한 살해되었다.
고구려는 무려 3만 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의 군대를 이끌고 백제의 한성을 공격합니다. 이 고구려의 대군에 의해서 백제의 한성이 점령되는 과정을 사료를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료 내용을 보면 고구려군이 백제 한성을 포위하고 불을 지릅니다. 이에 불이 나니 개로왕이 도망갔다고 합니다. 또, 자세히 설명하는 내용에서는 북성을 공격해서 뺏고 남성을 공격하니 개로왕이 도망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백제의 북성과 한성은 어디일까요?
백제 한성의 북성은 현재 서울의 풍납토성, 남성은 몽촌토성입니다. 여러 논란이 있지만 최근의 고고학 성과들과 특히 풍납토성 성벽 쪽에서 불에 그슬린 자국이 나오면서 북성이 풍납토성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사료를 종합할 때, 풍납토성에 불을 질러서 점령하고 몽촌토성으로 도망간 개로왕이 버티다가 탈출하다가 고구려군에게 잡혀서 죽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백제의 개로왕은 왕자인 문주를 신라로 보내서 구원군을 이끌고 오게 합니다. 하지만 신라군이 도착하기도 전에 살해당하고 말죠. 백제 입장에서는 국가가 멸망하기 직전의 절체절명의 상황이 펼쳐지게 된 것입니다. 살아남은 문주 등의 백제 잔여 세력은 웅진, 지금의 공주까지 후퇴해서 새로 도읍을 정합니다. 하지만 이후 백제는 어지러운 정치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신라의 입장에서도 고구려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백제가 무너진 것은 큰 사건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구축했던 백제와의 연합과 이를 바탕으로 한 대고구려 방어를 다시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었죠. 고구려는 한성을 점령한 후에 이에 대한 정비가 필요했기 때문인지 신라를 바로 공격하지 않습니다. 백제의 한성이 점령되면서 삼국의 대외 정세가 재편되고 이에 따른 내부 정비가 펼쳐지게 됩니다.
그리고 5년 후.... 고구려가 신라를 타깃으로 다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풍납토성 사진 출처: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331100110000&pageNo=1_1_2_0
몽촌토성 사진 출처:https://namu.wiki/w/%EB%AA%BD%EC%B4%8C%ED%86%A0%EC%84%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