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전쟁의 시작과 신라의 고구려세력 축출
지난 화에서 신라 눌지 마립간대에 있었던 하슬라성주 삼직의 고구려 장수 살해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건에 크게 분노한 장수왕은 군을 이끌고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합니다. 이 사건은 눌지 마립간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면서 우선 일단락 났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다시 예전처럼 우호적으로 회복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삼직의 고구려 장수 살해 사건이 있은지 4년 후에 고구려는 신라의 서쪽 변경을 침입합니다.
八月, 髙句麗侵北邊.
8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다.(『삼국사기』신라본기3 눌지 마립간 38년(454) 8월)
四十二年, 秋七月, 遣兵侵新羅北邉.
42년(454) 가을 7월에 군대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공하였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6 장수왕 42년(454) 7월)
해당 기록은 신라본기, 고구려본기에 모두 실려있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월이 다른데 각기 다른 원문 기록을 보고 『삼국사기』찬자들이 옮겼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이렇게 같은 사건이지만 연월이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이 같기 때문에 같은 사건으로 파악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죠.
어쨌든 454년 고구려의 신라 북변 공격은 245년 조분이사금대에 고구려가 신라의 동해안 지역을 공격한 이후에 처음 있는 공격이었습니다. 4년 전, 사건을 계기로 더 이상 고구려와 신라가 우호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사과를 했던 신라의 입장에서 고구려의 이러한 공격은 당황스러울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눌지 마립간을 비롯한 신라 조정은 이러한 고구려의 공격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준비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하는 이유는 밑에 적을 사료 때문입니다.
三十九年, 冬十月, 髙句麗侵百濟, 王遣兵救之.
39년(455) 겨울 10월에 고구려가 백제를 침범하니 왕이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삼국사기』신라본기3 눌지 마립간 39년(455) 10월)
'삼국전쟁연의'이라고 제목이 되어있는데 백제는 언제 나오는지 궁금하셨죠? 네, 드디어 백제가 나왔습니다. 그동안 백제가 나오지 않았던 이유가 다 있습니다. 백제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으로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403년 신라 변경 공격을 제외하고는 대외전쟁에 아예 참여하지 않습니다. 대략 50년 정도를 내정과 외교에 힘쓰는 시기를 보내죠. 그러다 다시 전쟁 기록이 나온 것이 위의 기록이었습니다.
455년 10월은 백제의 개로왕이 즉위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입니다. 왕이 바뀌고 얼마 안 되어서 어수선한 틈을 고구려가 노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신라가 군사를 보내서 구원해 줍니다. 이 전투는 백제, 신라가 최초로 군사 연합을 맺고 공동을 전쟁을 치른 첫 전투였습니다.
제가 1편에서 썼듯이 백제와 신라는 433년에 서로 화친을 맺습니다. 하지만 화친을 맺었다고 해서 반드시 군사작전을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양 국 사이의 신뢰가 쌓이고 합의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죠. 기록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433년 화친 이후에 백제와 신라가 신뢰를 쌓는 과정이 있었다고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특히나 450년 이후로 신라는 고구려에 공격에 대비해서 백제와 군사행동을 공동으로 할 수 있는 전초작업들을 해뒀고 이것이 455년의 전투로 드러난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455년 전투 이후에 삼국의 전쟁이 바로 격화되지는 않았습니다. 해당 기간에 삼국이 무엇을 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서 이 시기에 삼국 모두의 기록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큰 사건 없이 삼국이 내정에 힘쓰는 사이에 약 10여 년의 시간이 흘러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464년,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만 해당 기록은 『삼국사기』가 아닌 『일본서기』에만 있는 기록입니다. 그러므로 기록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분석하겠습니다.
八年春二月, 遣身狹村主靑·檜隈民使博德使於吳國. 自天皇卽位, 至于是歲, 新羅國背誕, 苞苴不入, 於今八年. 而大懼中國之心, 脩好於高麗, 由是, 高麗王遣精兵一百人, 守新羅. 有頃, 高麗軍士一人, 取假歸國, 時以新羅人爲典馬(典馬 此云于麻柯比), 而顧謂之曰. "汝國爲吾國, 所破非久矣(一本云 汝國果成吾土非久矣).
其典馬聞之, 陽患其腹, 退而在後, 遂逃入國, 說其所語. 於是, 新羅王乃知, 高麗僞守, 遣使馳, 告國人曰, "人, 殺家內, 所養鷄之雄者." 國人知意, 盡殺國內, 所有高麗人.
8년 봄 2월 身狹村主靑과 檜隈民使博德을 吳나라에 사신 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 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 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 사람을 말몰이(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うまかひ)라고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라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일본서기』권14 웅략천황 8년(464) 2월)
위의 기록은 『일본서기』에서 신라인들이 고구려 정병 100명을 포함한 나라 안의 고구려 사람들을 모두 죽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대사건임에도 『삼국사기』에 실리지 않았기에 사료의 신빙성에 대한 의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5세기의 고구려, 신라의 관계를 전공하시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해당 기록과 비슷한 사건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당시 고구려, 신라의 관계를 분석하십니다. 제가 지금까지 서술했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보면 신라가 고구려세력을 축출해야지만 가능한 행동이라고 분석하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석에 따라서 위의 기록을 464년이 아니라 454년으로 잘못 적힌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해당 견해를 주장한 연구자님은『삼국사기』눌지 마립간 37년에 '이리떼가 시림에 들어왔다'는 기사가 『일본서기』의 사건을 은유적으로 적은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셨죠.
하지만 저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464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비슷한 시기의 중국사서에서 나오는 '倭5王의 작호'기사와 관련이 있습니다. 해당 내용에 관한 논문은 제가 아래에 참조해 두겠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면 4세기 후반~5세기 중반까지 중국에서 책봉을 받은 왜의 5왕이 있다고 합니다. 이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왜왕 '武'가 위에 적은 웅략천황이라고 파악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웅략천황의 책봉 기록부터 중국 사서의 기록과 연도가 동일합니다. 때문에 많은 연구자들이 웅략천황부터 『일본서기』의 연도가 신빙성이 높다고 보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 견해에 동의해서 위 기록은 464년에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고구려군이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신라가 백제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 에 대한 의문을 가지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여기서 저의 약간의 추측이 들어가겠습니다! 저는 당시 고구려군이 주둔했던 곳을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대 근처의 신라 영토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추측하면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 지대는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문경 부근입니다. 신라에서 백제로 갈 수 있는 길은 상주 쪽에 있습니다. 고구려군의 방해 없이 백제 영토로 갈 수 있는 것이죠.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저의 추측입니다. 일단 이 글은 제 글이니깐 464년으로 위의 사건을 판단하겠습니다.(여러분은 454년 설과 464년 설 중에 어느 견해에 더 동의를 하시나요?)
464년 자비 마립간대에 신라의 영토는 고구려 세력을 축출하는데 드디어 성공합니다. 하지만 고구려가 이것을 두고 볼리가 없겠죠? 이제 본격적인 고구려의 공세를 맞이하는 신라의 시련이 시작됩니다. 다음 편을 기대해 주세요!
왜5왕 관련 논문
홍성화, 5세기 百濟의 정국변동과 倭 5王의 작호, 한국고대사연구 60, 2010.
박대재, 『본조통감』의 상대(上代) 기년(紀年)과 외국 사서의 수용-『일본서기』기년론과 관련하여,
동북아역사논총 64,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