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동성왕의 내정과 신라의 축성
481년, 고구려는 신라의 경주로 진공 하지만 미질부에 신라, 가야, 백제 연합에게 막히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으로 고구려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고 말았죠. 이후에 고구려는 대군을 움직이기보다는 신라와 백제를 꾸준히 공격하는 방식으로 전환합니다. 고구려의 공격을 맞으면서 신라와 백제는 내실 다지기에 들어가게 됩니다.
시간을 481년에서 조금 앞으로 돌려보겠습니다. 34편 연재에서 백제는 수도였던 한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기고 왕자인 문주를 중심으로 지금의 공주, 웅진으로 피난했다고 제가 적었습니다. 이후 백제는 정치적으로 큰 혼란기를 맞이합니다. 문주왕은 재위 3년 만에 병관좌평(지금의 국방부장관) 해구에게 살해당합니다. 문주왕의 아들 삼근왕은 아버지를 죽인 해구를 제압하지만, 역시나 재위 3년 만에 18살의 어린 나이에 석연치 않은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 이후에 즉위한 것이 동성왕입니다. 동성왕이 재위한 지 2년 만에 발생했던 전쟁이 5편에서 적었던 481년 미질부전투입니다. 475년의 복수를 제대로 한 것이죠!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탄력을 받은 동성왕은 '진로'라는 인물을 병관좌평에 맡깁니다. 진로가 어떤 사람인지는 더 이상 정보가 없지만 나라의 군대를 관리하는 관직을 왕이 직접 임명했다는 것은 이전의 정치적 혼란 상황보다 훨씬 나은 상황이라는 것이죠. 물론 고구려가 백제를 지켜만 본 것은 아닙니다. 다음 사료를 보겠습니다.
秋九月, 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戸以歸.
(482) 가을 9월에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3백여 호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五年, 春, 王以獵出, 至漢山城, 撫問軍民, 浹旬乃還.
5년(483) 봄에 왕이 사냥하러 나가 한산성에 이르러 군사와 백성들을 위무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秋七月, 髙句麗侵北邊, 我軍與百濟合擊於母山城下, 大破之.
(484) 가을 7월에 고구려가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우리 군사가 백제와 함께 모산성 아래에서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고구려는 미질부 전투 이후에는 신라와 백제를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482년에는 말갈의 습격을 받아서 백제가 반응하기도 전에 백제인들이 끌려갑니다. 동성왕은 다음 해에 바로 한산성으로 가서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이 사건을 수습합니다. 이후 484년에는 고구려의 공격을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서 막아냅니다. 475년과 비교하면 효과적으로 고구려군을 방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죠.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동성왕은 외교 정책도 적극적으로 추진합니다. 484, 486년에는 남제에 사신을 보내고, 485년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서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고 493년에는 신라와 혼인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그리고 486년에 우두성, 490년에는 사현성, 이산성을 쌓아서 방어체계를 정비하죠. 제가 간단하게 적었지만 벌써 백제라는 나라가 안정화되어 간다는 게 느껴지죠? 이렇게 백제는 웅진에서의 국가 체제를 다져나갑니다. 그렇다면 신라는 이 시기에 무엇을 했을까요? 다음 사료를 같이 보겠습니다.
七年, 春二月, 築仇伐城.
7년(485) 봄 2월에 구벌성을 쌓았다.
八年, 春正月, 拜伊湌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攺築三年·屈山二城.
8년(486) 봄 정월에 이찬 실죽을 장군에 임명하였다. 일선계의 장정 3,000명을 징발해서 삼년성과 굴산성 두 성을 고쳐 쌓았다.
秋七月, 築刀那城.
(488) 가을 7월에 도나성을 쌓았다.
신라는 적극적으로 성을 쌓는 모습을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480~490년까지 신라의 축성 기록은 3건뿐입니다. 하지만 사실 신라는 더 열심히 축성을 했습니다. 사료에는 나오지 않지만 고고학이 발전하면서 발굴성과가 많이 나오면서 알 수 있게 되었죠. 다음 지도도 같이 보겠습니다.
제가 직접 구글어스에서 찍어둔 신라 400년대 후반에 지은 산성들입니다. 정선->영월로 남한강 유역을 따라서 산성을 추가로 지었고, 사료에 나온 삼년성, 굴산성도 보입니다. 여러분이 아시던 400년대 신라의 영역이랑 차이가 있죠? 신라는 산성을 지어서 애매하게 중간지대로 남아있던 지역들을 확실하게 신라의 영역으로 삼습니다. 일명 '공세적 축성'이죠.
이러한 축성을 바탕으로 신라는 예전에 고구려의 진군로였던 남한강 상류를 확보하고 동시에 대한 방어 체계를 갖춥니다. 또한 백제와 신라 사이에 성을 쌓아서 영토를 확보함과 동시에 고구려가 국원(충주)에서 남하할 때에 백제와 연합하기 좋은 상황도 갖추었죠. 고구려가 북위와의 외교에 집중하면서 신라, 백제를 견제정도만 하고, 백제가 내정을 다지는 사이에 신라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영역을 넓혀나갔던 것입니다.
미질부 전투 이후 약 13년 동안은 이러한 삼국 관계가 유지됩니다. 그리고 494년. 고구려가 다시 기지개를 피고 신라와 백제를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5세기 고구려의 마지막 공세가 시작되는 것이죠.
다음 연재를 기다려주세요~
표지 사진: 보은 삼년산성(https://namu.wiki/w/%EC%82%BC%EB%85%84%EC%82%B0%EC%84%B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