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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전쟁연의] 10. 고구려, 신라를 쫓아내라

고구려의 우산성 공격과 신라의 방어 실패

by cm

494년 견아성 전투, 495년 치양성 전투에서 백제와 신라는 서로를 구원하면서 고구려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연합을 깨기 위해서 중간지대인 충북지역을 공격한 건데 오히려 두 국가의 연합을 돈독히 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죠. 이에 고구려는 전쟁 전략을 수정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연속 우산성 공격과 점령


고구려는 496년, 497년 신라의 우산성을 연속해서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우산성 전투는 견아성, 치양성 전투와 전투의 양상이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는지 밑에 기록을 같이 보시죠!


秋七月, 髙句麗來攻牛山城. 將軍實竹出撃泥河上, 破之.

(496년) 가을 7월에 고구려가 와서 우산성을 공격하였다. 장군 실죽이 출격해 이하 가에서 그들을 깨뜨렸다.


八月, 髙句麗攻䧟牛山城.

(497년) 8월에 고구려가 우산성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의 구원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우산성이 공격받았는데도 백제의 구원이 없었던 거죠. 백제가 신라의 우산성을 도와주지 않았던 것에 대해서는 여러 원인이 제기되었습니다. 크게 나누면 '백제와 신라의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 백제가 도와줄 수 없는 위치에 우산성이 있었다'의 두 가지입니다.


백제와 신라의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이라는 설은 501년에 백제가 신라를 대비해서 탄현에 목책을 세웠다는 기록을 근거로 합니다. 그런데 496~497년의 일을 4년 뒤의 미래인 501년 기록을 가지고 원인을 찾는 게 맞는지 저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백제가 도와줄 수 없는 위치에 우산성이 있었다는 설을 지지합니다. 고구려의 전쟁 전략이 바뀌어서 백제가 구원할 수 없는 곳을 일부러 공격했다고 생각한 것이죠! 우산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영월의 정양산성설이 우세하다가 최근에 단양의 공문성설이 나왔습니다. 고구려의 공격로 등을 고려했을 때에 국원(충주)에서 접근이 쉬운 단양 공문성설에 저는 동의를 합니다.


우산성을 깨뜨리면서 고구려는 신라의 단양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신라는 북쪽에서 소백산맥을 넘어서 나갈 수 있는 죽령로가 막히게 되었죠. 교통로 중에 하나를 잃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신라는 우산성 전투를 마지막으로 50년 정도를 내부 정비의 기간으로 가지게 됩니다.


다음 연재글에서는 우산성 전투 이후 삼국의 상황과 전쟁 양상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표지 사진: 단양 공문성:https://www.dailian.co.kr/news/view/409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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