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못하는

by 솔솔솔파파

"오늘은 무슨 이야기할까요?"

"하하하 뭔 이야기를 또 해? 이제 다 한 것 같은데..."


매주 찾아뵙거나 전화를 드려서 이야기를 들려 달라고 하면 어머니는 겸연쩍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곤 한다. 하지만 말씀을 한 번 시작하시면 1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혼자 사시니 누구랑 이야기하는 것이 재밌기도 하실 테고, 옛날 생각하면서 아버지 욕하시는 것도 나름 통쾌하기도 하실 것 같았다.


오늘은 어머니 인생에서 자식이 어떤 의미였는지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사람이 하루 종일 죽을 것처럼 힘들어도 하루 한 번 웃을 일이 있으면 살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도 그 힘든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너희들 크는 것 보면서 많이 웃었지. 아빠랑 싸워서 힘들다가도 너희들이 방긋방긋 웃으면 또 잊고 살게 되더라. 한 번은 정말 크게 싸우고 이혼한다고 혼자 친정에 왔어. 너희 아빠가 할머니랑 같이 살 때 자기 엄마한테는 극진히 하면서 나한테는 힘든 일 다 시키고, 자기 엄마는 아무 일도 못 하게 하는데 얼마나 열받던지... 애들 놔두고 '고생 좀 해 봐라' 하는 심정으로 친정에 갔지. 그랬더니 그다음 날부터 매일 친정에 찾아와서 집에 가자고 그러더라고. 난 끝까지 안 가고 버텼어. 이혼 서류 가지고 와야지, 안 그러면 안 간다고. 며칠 지나서 아이들이 잘 지내는지 걱정돼서 동생을 보내서 어떤지 봤더니 시어머니가 돌보는데 엄청 힘들어하신다고 그러더라고. 결국 난 일주일 만에 너희 아빠랑 이야기하고 들어갔지. 그런데 얼마 지나서 동네에서 아빠가 혼자 키우는 아이가 있는데 아빠가 혼자 도저히 못 키워서 입양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 '우리 아이들도 내가 이혼하면 저 아이처럼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니까 더 이상 아이들 두고 친정에 못 가겠더라고.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절대 안 갔어."


고단했던 하루하루를 보내며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떠나고 싶기도 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때마다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잡는 것은 자식들이었다. 첫째의 재롱을 보며 하루를 버티고, 둘째의 뒤집기를 보며 하루를 버티고, 셋째의 첫걸음마에 또 하루를 버티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별일 없이 잘 커서 크게 기억에 남는 일이 없다고 하신다. 사는 게 바쁘고, 힘들고, 식구들 밥 해 먹이느라 정신이 없어서 자식들이 어떻게 크는지 잘 챙겨보지도 못하고, 살갑게 해주지도 못해서 미안한 마음뿐이라 하신다.


갑자기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드리는 것이 어떠신지 궁금해서 여쭤보았다.

"이렇게 나랑 이야기하는 거 좋으셔요?"

"응. 좋아. 마음도 편하고. 너무 고마워."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엄마, 엄마 감정을 다 표현하시면서 사세요. 많이 억누르고 사시는 것 같아요. 그럼 다 병 돼요."

"언젠가 누가 그러더라고. '형제자매 많은 집에서 태어나서 너무 외로우셨을 것 같아요'라고. 근데 그 이야기를 듣고 나니까 막 눈물이 나더라고. '내가 너무 외로웠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맞아요.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 하시느라고, 정작 엄마 자신을 너무 외롭게 하셨어요. 지금부터라도 미워하고 싶은 사람 미워하고, 사랑하고 싶은 사람 맘 놓고 사랑하면서 사세요."

"난 그냥 어렸을 때는 아버지가 불쌍해서 어떻게 해서든 아버지를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고, 결혼해서는 남편한테 사랑받고 싶었는데, 아버지는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시고, 친정 돕는다고 남편 마음 아프게 해서 사랑도 못 받았어. 난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지금은 안 보이고 병들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 보면 너무 불쌍해."

어머니가 목 놓아 우신다. 난 조용히 어머니의 하소연과 애달픔을 들어드렸다. 작은 공감의 추임새를 넣으며 충분히 이야기하실 수 있게 들어드렸다.


어머니가 고통받는 이유는 미운데 미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싶은데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남편도, 동생들도 어머니에게 모두 모질게 대했지만 혈육이라는 이유로, 배우자라는 이유로 충분히 미워하지 못하신다. 미워하지 못하시니 화살은 어머니 자신에게로 다시 돌아와 자신을 탓한다. 그 해결되지 않은 화를 내내 가슴에 품고 사시니 어찌 병이 안 드실까.

이런 이야기를 속 시원하게 하시면서 시원하게 울기라도 하시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실 것 같아서 실컷 우실 수 있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나도 눈물이 계속 나서 말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코를 훌쩍이며 흐르는 눈물을 멈추려 애썼다.


"이제 그만 애들한테 가 봐라. 너무 오래 통화했다." 통화 시간은 1시간을 넘어 2시간이 다 되어간다.

"네. 알겠어요. 엄마도 어서 식사하세요."

"그래, 너무 고마워."

"네. 엄마 사랑해..." 말끝을 흐렸다.

"그래, 엄마도..." 어머니도 말을 잇지 못하셨다. 끝내 우리는 울면서 통화를 마쳤다.


미운 사람은 충분히 미워해야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이나 입장을 이해한다고 멈춰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이기적으로 나만 생각하고 미운 사람을 미워해야 한다. 그래야 그 미움의 끝에서 다시 사랑이 피어난다.


어머니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지 못해서 스스로 탓하시는 것을 멈추시길...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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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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