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어떻게 만나셨어요?”
“별거 없어”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어머니의 인생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신 아버지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여쭤 보았다.
어머니는 쑥스러워하셨지만 웃으시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 그 시간에 계신 것처럼…
처음에는 그냥 옆집 남자였다.
우리 집에서 운영하는 가게의 손님으로 왔다. 양말, 속옷, 넥타이 등 생활필수품을 파는 잡화점이었던 우리 가게에 그 남자는 자주 왔다. 물건을 살 때마다 무엇을 살지 망설이며 나에게 조언을 구했고, 내가 추천하는 것을 아무 말 없이 사 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말수가 적었던 그 남자는 그때부터 나를 마음에 두기 시작한 것 같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는 명절 때마다 와서 아버지께 인사드리는 성실한 단골손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군대에 간다며 우리 집에 인사를 왔다. 그리고는 봉투를 꺼내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땅문서였다. 지금의 제3한강교(한남대교) 근처 어딘가의 땅. 군 복무 중 맡아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문서가 나의 인생을 바꿀 하나의 사건이 될 거라고는 그때 생각지도 못했다.
당시 아버지는 여러 사업을 하셨지만, 전쟁 후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 사업은 늘 어려웠다.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시절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맡긴 땅문서를 오래 지켜주지 못했다. 제대 후 아버지를 찾아온 그 남자에게 아버지는 땅문서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다. 전 재산이었던 그 땅을 잃은 남자의 표정은 막막했다.
며칠 후 그 남자는 다시 찾아와 나와 결혼하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했다. 절대 시집보내지 않으려 했던 나를, 아버지는 그 남자에게 보내기로 했다. 나는 가기 싫었다.
팔려가는 것처럼 시집가는 것도 싫었고, 남아서 아버지를 돕고 싶은 마음도 컸다. 무엇보다 그 남자는 내 인생에서 한 번도 나를 설레게 한 적이 없었다. 키는 작고 늘 소극적이었으며 말도 별로 없었다. 그런 남자와 결혼해야 한다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모든 원인은 아버지 때문이었지만 나는 그 남자가 너무 미웠다. 길에서 마주치면 모른 척했고, 무시했다.
그러자 하루는 우리 집에 찾아와 나의 차가운 태도 때문에 결혼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아버지께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저 아이는 내 말을 한 번도 거역해 본 적이 없는 아이니까, 이번에도 내 말을 들을 거야."
아직도 기억난다. 옆방에서 조용히 숨죽이며 아버지의 그 말을 듣던 순간을. 한참을 울었다. 왜 그렇게 슬펐는지는 모르겠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 시집가야 하는 나,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나, 아버지가 불쌍해서 그 말을 거역하지 못하는 나. 모든 것이 뒤섞여 있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결심했다. 아버지를 위해 시집을 가겠다고.
그래서 그 남자는 남편이 되었다.
시집을 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친정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웠고, 부모님과 여섯 명의 동생들이 길거리로 쫓겨났다. 나는 우리 집 보증금을 빌려주고, 생활비 일부를 도와주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빚을 얻어서라도 친정 식구들이 살 집을 구해주었다.
남편은 내가 몰래 돈을 빼돌려 친정에 준다고 의심했다. 생활비를 검사했고, 큰돈은 나에게 맡기지도 않았다.
자기 부모가 집에 오면 극진히 대접하고, 나의 부모가 집에 오면 무시하고 모른 척했다. 나는 그 사람이 너무 미웠다. 다른 건 다 참아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아버지가 집에 왔을 때 한 그 말은 아직도 가슴에 짙게 남아 있다.
"야~ 저 대머리는 또 왜 왔냐? 또 돈 빌려달라고 온 거 아냐?"
심장이 세차게 뛰었고, 가슴은 찢어질 것만 같았다. 나도 지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렇게 한 바탕하고 나면 남편은 며칠, 혹은 몇 주를 말을 안 한다. 손으로 때리지만 않았지 그것은 폭력과 같았다.
그 어떤 말에도 대답하지 않는다. 차라리 소리 지르며 싸우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사람을 더 피 말리게 하는 일이었다. 너무 답답한 어느 날은 밤에 옥상에 올라가 맨바닥에 누워 하늘의 달을 보며 멍하니 있으면 나도 모르게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이런 마음을 누군가에게 터놓고 말할 사람도 없었고, 부모님에게 이야기하면 더 마음 아파하실까 봐 말하지 못했다. 그냥 그렇게 달을 보며 속으로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 일이 일어난 후, 나는 그 사람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