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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이 희망이 되는 순간

거봉 한 알에도 희망이

by 산들 Feb 1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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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습관이 바뀌면 죽을 때가 다 되어간다고 하신 옛 어른들의 말씀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 말은 죽기 직전에 알 수 있고 죽다가 살아나야 알 수 있는 말임을 위를 잃은 후에야 알게 되었다. 위가 없으니 음식을 조심할 수밖에 없고 먹을 수 있다는 그 자체가 감사해서 음식을 맛으로 먹기보다 약으로 먹는다. 아프기 전에는 떡볶이, 짬뽕과 같은 미각을 자극하는 양념이 듬뿍 들어간 매운 음식과 국수 종류를 좋아했는데 지금은 식습관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위 수술이 무사히 끝나고 일주일 뒤 이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떠있던 나는 물 한 모금을 넘기는 순간 절망적인 순간을 경험했다. 물이 식도로 내려가다가 다시 튕겨 올라오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액체가 바로 기체로 변하면서 밖으로 빠져나오는 느낌이었다. 위를 완전히 절제하고 십이지장을 연결했기 때문에 음식을 먹으면 소장으로 바로 내려간다. 내 몸이 반사적으로 음식을 거부하고 있었다. 두려웠다. 의사는 유동식 중심으로 조금씩 먹는 연습을 하라고 했다. 유동식은 고사하고 물 한 모금 삼키기도 힘든데 어떻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수술한 것이 후회되었다. 짧게 살더라고 맛있는 음식 실컷 먹고 싶었다. 미음이 나왔지만 거의 먹지 못했다. 내가 과연 음식을 삼킬 수 있을 것인지 의심이 되었다. 그래도 살아있으니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할 거라 스스로 위로도 해보았지만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순 없었다.

     

퇴원은 했으나 거의 먹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5일 뒤 병원 외래진료가 있어서 근처 암 환자 전문 요양병원에 다시 입원했다. 요양병원에서 담백한 음식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식욕이 없어서 죽 한 숟가락 먹는데 삼십 분 이상 걸렸다.     

며칠 죽과 씨름하다가 과일이 생각나서 마트에서 거봉과 바나나를 샀다. 그런데 오는 길에 수제 맥주 가게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시원한 맥주 한잔을 먹고 싶었다. 맥주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의 목 넘김이 간절하게 느껴졌다. 죽 한 숟가락도 겨우 먹는 사람이 맥주라니 가당치가 않았다. 그러나 남편이 마시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남편에게 사서 마셔보라고 권했다. 옆에서 지켜보다 어떤 맛인지 궁금하기도 해서 한 모금 맛보고는 그대로 뱉어버렸다. 내가 생각하는 맛이 아니었다. 아마도 금지 음식이라는 생각이 강해서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마음이 짠했다. 먹는 것이 이렇게 간절해지는 날도 있구나.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것이 아니라 몸이 받아주지 않아 못 먹으니 더 서글퍼졌다.

슬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거봉 한 알을 따서 먹어보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잘 넘어가지 않는가. 한 송이를 다 먹었는데도 거부감이 없었다. 희망이 보였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구나! 거봉이 나를 살리는 음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식욕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다른 음식도 먹기 시작했다. 아니 먹는 연습을 했는지 모른다.


보통 음식은 위산에 의해 녹여지고 완전히 반죽이 된 상태에서 소장으로 내려가기 때문에 사람들은 소장이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음식을 먹은 후 곧바로 소장이 꿈틀거린다. 그래서 최대한 입에서 충분히 씹어서 삼킨다. 밥 먹으면서 국물이라도 먹으면 음식물이 너무 빨리 내려가서 덤핑 현상이 생기는데 이때는 정말 괴롭다. 덤핑 현상이 일어나면 현기증이 나기도 하고 식은땀이 나면서 온몸에 기력이 없어지고 소장이 요동을 친다. 그럴 때 소파에 기대어 휴식을 취하면 시간이 지나면서 괜찮아진다. 처음에는 이런 현상을 겪으면서 많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음식 먹은 후 오롯이 그 순간을 지켜본다. 아무 생각이 없어지고 마치 명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부드럽고 소화 잘되는 음식을 찾다 보니 두부, 낫또, 청국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낫또는 싫어하는 음식 중 하나였는데 이제는 그냥 먹는다. 질퍽하고 질질거리는 식감 때문에 꺼려졌었다. 무른 느낌을 조금 감해보려고 식초 물에 쥐눈이콩을 발효시킨 초콩과 아마씨를 갈아서 섞은 후 김에 싸 먹는다. 초콩의 신맛과 아마씨의 고소한 맛이 어울려 먹을만하다. 음식이 맛있어서 먹는다기보다 건강을 생각해서 먹으니 나에게 음식은 약과 다름없다.     

약처럼 먹는 또 다른 음식은 '사워 크라우트'라고 불리는 독일식 김치이다. 이 음식은 양배추를 소금으로 절여 발효시킨 음식이다. 양배추가 위에 좋다고 해서 양배추를 항상 쪄서 먹곤 했다. 양배추는 열을 가하면 영양소가 파괴되고 생으로 먹으면 가스가 많이 찬다. 어떻게 먹을지 고민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양배추로 천연 유산균을 만드는 영상을 접하게 되었다. 양배추를 흐르는 물에 씻어 말린 후 2센티 정도로 썰어 2프로 소금을 넣고 양배추 자체에서 즙이 나올 때까지 바락바락 문질러야 한다. 손목이 조금 아프지만 마치 빨래하듯이 치대면 시간이 지나면서 양배추가 축 늘어지면서 즙이 나온다. 그때 소독한 유리병에 꼭꼭 눌러 담고 밀봉한 후 겨울은 5일 이상, 여름은 3일 정도 두면 뽀글뽀글 거품이 올라오면서 발효가 된다. 발효가 끝나면 바로 냉장 보관하여 먹으면 된다. 소화에도 좋고 장에도 좋아 즐겨 먹는 음식이다. 적 양배추와 반반 섞으면 진달래색의 고운 빛깔이 되어 눈까지 즐거워 식욕을 돋운다.  

   

누가 좋다고 해도 내가 먹어보고 맞지 않는 것은 미련을 버린다. 며칠간 장에 탈이 나서 고생하기 때문이다. 7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이제 좀 살만해지니 옛 습관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한다. 가끔 뜨거운 국밥이 목구멍과 위를 타고 내려가 내부 장기를 찜질하는듯한 시원함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몸 전체가 예민해져서 조금이라도 뜨거운 음식을 먹으면 입천장이 까져서 먹을 수가 없다. 장애가 불편하지만 살아가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으니 지금은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다.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기 위해 오늘도 나는 음식을 꼭꼭 씹어서 소장에게 무리가 가지 않도록 천천히 음식을 먹는다. 있을 때 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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