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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름에 내가 떠나보내야 했던 것들

쓰이는 마음과 써 내려간 마음

by 필연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났던 날,

“여름이 되면 네 생각이 나더라”라고 흘리듯 말하던 그 말이

나는 마치 그렇다 할 질량도 없이 메마른 휴지조각이 나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그 여름의 습기를 머금었던 걸까.

지나간 내 시간의 어느 페이지에 달라붙어 있었다.


이제는 안부조차 알 길이 없을 만큼 시간도, 마음도 멀어졌지만,

혹시 이번 여름에도 그 사람은 내 생각이 났을까.

미약하게나마, 궁금하다.




나는 분명 나의 모든 마음을 끌어다 그 사람에게 다정함과 섬세함을 주의 깊게 기울였다고 믿었다.

하지만 이 마음은 끝내 그에게 어떠한 일말의 요동도 주지 못했음을 기억한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가 다시 만났던 날,

헤어졌던 지하철 출구에서 다시 마주했던 그날,

나는 그 출구로 걸어가기까지 얼마나 발걸음이 무거웠는지 모른다.


무정했던 과거에 대한 미움으로 점철되어 표독스러워진 마음 때문이었다기 보다도

그 사람에게 이제는 그 이상의 무슨 마음을, 어떻게 줄 수 있을지.


이 질문을 또 한 번 마주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 내가 밀어내야 했던 이유였다.




한참이 흐른 작년 늦여름,

내가 살고 있는 이 집이 너무 적적하게 느껴져 ‘페페’라는 식물을 들여왔던 적이 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잎이 연해지더니 줄기마저 힘없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볕 드는 창 아래에 놓아두고, 바람도 쐬어주고, 물도 주고,

매일 페페 앞에 앉아 다정히 돌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모두 시들어갔다.


화분에는 그렇게 무상함만이 남았다.


그즈음,

<이웃집 식물 상담소>라는 책을 읽으며

나의 페페가 죽어갔던 이유를 아스라이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마음을 다해 기울였다고 믿었던 그 시절도 조심스레 다시 꺼내볼 수 있었다.


지금 키우고 있는 식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면 사랑을 줄여보길 권한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름다운 꽃을 보게 되지 않을까? 살아가며 우리가 겪는 많은 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사랑한다며 나 자신을 좀먹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일도 많다. 사랑을 조금 줄여보면 우리 인생에도 관계에도 기다리던 꽃이 필지 모를 일이다. (이웃집 식물 상담소, p.59)


어쩌면 내가 준 마음은

온전히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나를 위한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식물도, 마음도 온전히 내 몫으로 나 혼자 키워본 적이 없었기에 잘 몰랐던 거다.

나는 분명 ‘좋음’이라는 가치를 전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받음의 대상과 나란히 선 채로, 받는 마음까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것도, 누군가에게 마음이 쓰인다는 것도,

이제는 내 방식대로 마음을 쏟아 붓기보다

그 사람이 내가 전할 마음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먼저 생각해보려 한다.




타지에서 자취하며 공부하던 스물다섯의 그 사람은

내가 그에게 쓰는 돈을 기꺼이 잘 받지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사람에게 ‘만나자’는 말 한마디조차 더욱이 조심스러웠다.

특히나 월말은 분명 그에게 부담이 되었을 테니깐.


그래서 언젠가 함께 먹은 어느 저녁,

나는 3천 원짜리 치킨마요덮밥이 제일 좋다고 말했었다.

“혹시 나 돈 없을까봐 이거 먹자고 한 거 아니지?” 라며 나에게 물었을 때,

나는 전혀 아니라고 웃으며 신신당부했다.


내 마음이 너무 컸기에

나는 그 사람 앞에만 서면 낮아지고 또 움츠려 들었다.

그와 이어 갈 명분이 없으면, 더이상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이제는

구걸해서 얻은 마음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쓰일 수 있는 내 마음조차 그저 기꺼웠고

그 사람에게 닿지 않는다면,

닿을만큼 흘러넘치게 내 마음을 쓰면 된다는 자신만만함이 있었다.



그 사람이 스물일곱이 되던 해,

스물다섯이었던 그 시절, 그가 진심으로 바라던 꿈을 이루고 나서,

예전의 내가 쉬림프파스타를 먹고 싶어 했었다며, 그걸 사주고 싶다는 연락을 해온 날,

떠올랐다.


사실 그 과거에 내가 그 음식을 먹고 싶다고 말했던 이유는

스물한 살의 내가 짜낼 수 있었던 최선의 핑계였는데.


그런데 혹시나, 그 말이-

내가 배려라 여겼던 그 마음이-

부담을 주지 않으려 포장했던 그 마음이-

그 사람에겐 오히려 미안함이자, 부담이 되었던 걸까.

나는 또 그게 그렇게 속상했다.


식물의 당연한 죽음을 모른 채로 식물이 죽어가는 내내 걱정하고, 식물을 다시는 키우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식물을 좋아한다면 애써 키우던 식물이 죽더라도 용감하게 계속 좋아하기를 응원한다. (이웃집 식물 상담소, p.71)


나는 식물을 잘 키우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초등학생 때부터 알고 있었다.

매년 학급 창가의 화분들 중 항상 내 것만 남들보다 먼저 시들었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나는 예쁜 꽃보다는 쉽게 죽지 않는 선인장이나 산세베리아를 택했다.

그 후로는 식물을 키우지 않았다.

곧 죽어버릴 것을 알기에 애초에 키우지 않는 편이 나에게도, 식물에게도 배려라고 생각했다.


사람도 그랬다.

쉽게 저물 인연이라고 여겨지면 마음을 열지 않았다.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는 걸 확실히 느끼게 된 후로는,

언젠가 헤어지더라도 그간 내가 들인 마음의 쓰임이 아깝지 않을 사람만 만나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게 얼어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누군가를 만나면 조금 더 차분하게, 고요히 어여쁘게 바라봐 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그 사람이 드러낸 ‘행’보다 그것들 사이의 ‘행간’을 조금이나마 읽어낼 수 있을 것 같다.


강렬하고 따가운 열기만이 여름이라고 믿었던 시절은 지나가고 있다.


온화하게 사그라지는 대기 속의 열기, 점차 굳어지는 대지의 냉감 –

한여름이 지나 늦여름으로 향해가는 이 계절도 분명, 여름일 테니.


그때 나에게, 여름이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라고 말해줘서 고맙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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