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가 자전거를 잘 탈 수 있게 된 방법

자기 신뢰ㅣ 우리는 결국 스스로 페달을 굴려야 한다는 사실

by 필연

나는 지금껏 인생을 살아낸 이 지점에 서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

길게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벼이 지나치고자 한 인생은 아니었다고 자신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인생의 무게란,

고통이나 책임, 고난, 역경을 얼마나 짊어졌는가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믿을 수 있기에, 스스로를 지탱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묵직함’, 어쩌면 이건 모종의 ‘안정’에 가까운 무엇이다.


자기 신뢰.

어릴 적 처음 자전거를 탔을 때가 떠오른다.

네발자전거에서 두 개의 보조 바퀴를 떼어내었을 때,

나는 그 불안함을 아빠의 두 팔에 의지해야 했다.

그러다 언젠가, 그 팔로부터 벗어나야

내가 더 멀리, 더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 있었다.

단단히 나를 붙들던 두 팔은 어느새 사라지고,

이제는 두 눈만이 내 뒤를 든든히 받쳐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제야 내가 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하는 유일한 일은,

바로 내가 나 자신을 믿는 것이었다.


그때 내가 배운 것은 단순히 자전거를 타는 기술이 아니라,

그 위에 타고 있는 ‘나 자신’이었다.


나는 내 발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고,

넘어지기도 했지만 다시 올라탈 수 있었으며,

달리다 지치면 한쪽 다리로 멈춰 설 수도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자전거를 잘 타지 못했던 건 기술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위에 올라탄 내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이제야 알 것 같다.


“자전거를 어떻게 하면 잘 탈 수 있을까?”

“일단 자전거에 올라타. 그리고 페달에 발을 얹고, 두 다리로 힘차게 굴리면 돼.”

“그건 너무 당연하잖아.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라고.”

“그러면 이제, 올라탄 사람이 자신을 믿으면 되겠네.”


삶은 언제나 불확실하다.

기대하거나 예측할 수 있는 미래란 전무하다.

일상은 단조로워 보이지만, 결코 평탄하지는 않다.

이토록이나 복잡해 보이지만, 막상 돌아보면 본질은 늘 순도 높게 단순한 것들이었다.


나는 자주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왔다.

피곤한 사람처럼 비칠지 몰라도,

그 질문을 통해서 더욱이 풍부하게 살아낼 수 있었던 시간들이 진실이었다고 믿는다.

내가 내놓은 답이 정당성을 부여받기 위해서는

그 방향대로 흘러갈 수 있도록 살아내야 했고,

그러한 태도들이 모여 결국 나의 신념이 되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믿기 위해서는

내 인생 앞에서 부끄럼 없이 진실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어떤 인생을 살아가고 싶은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어쩐지 거창하고 미사여구로 치장된 답을 내놓아야 할 것만 같고,

어차피 지키지 못할 말들뿐이라는 생각에, 두 입술은 지나치도록 무겁다.


사실 나는,

투명한 햇살이 머무는 창가에 앉아

커피 한잔과 책 한 권이면 충분한 사람인데 말이다.


그래서 이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이 순간의 나에 대해 질문하려 한다.

과거는 이미 흘러가버렸고,

후회스럽다 하여도 되돌릴 수는 없다.

미래라 함은 불확실함의 또 다른 이름이니,

그곳을 향해 질문에는 애초에 명확한 답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어제를 살다 간 사람도,

내일을 살아갈 사람도,

오늘을 살아가는 이는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나는 무엇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까.


나는 오늘을 지켜야 한다.

그래서 오늘을 온전히 살아내려 한다.

물론 더 나은 내일을 향해 살아가는 태도도 중요하지만,

어차피 오늘이란 어제의 내일이었다.

내가 오늘을 온전히 살아냈다는 그 성취감은

그 순간 내가 쏟을 수 있었던 최선이었다는 확신이 되어 줄 것이다.


그렇게 오늘을 지켜냈다면,

과거를 불만스러운 후회로 채우거나, 미래를 향한 막연한 기대에

오늘의 소중한 순간들을 허비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나를 신뢰하고,

나에게 기대할 수 있으며,

나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