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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 그 시작의 순간

저는 당신의 꿈이 되어야겠습니다.

by 필연

나는 '엄마의 꿈이자 아빠의 자랑'이다.

정확한 시작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초등학생 때 인터넷 어딘가에서 본 글귀였을 것이다. 나는 저 한 문장을 지금 내 검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분홍색 포스트잇에 적어 책상에 앉았을 때 내 시선이 가장 쉬이 머무는 곳에 붙여놓았다. 아직도 본가에 가면 남아있을 것이다. 혹시나 저 종이가 떨어지면 내 소원도 시든 꽃잎처럼 처량히 떨어질까 봐 테이프를 붙여놓고 손으로 건들지 않고 모셔놓았던 노력 덕분일 테지.


초등학생의 나는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저 종이를 부적처럼 쳐다만 보았었던 것 같다.

막연한 포부였다. 그 시절 나의 최고 성공이랄 게 성적밖에 없었을 적이라 아무리 생각해도 공부를 잘해서 함박눈 내리는 성적표 가지고 가면 엄마 아빠가 행복해하지 않을까 싶었다.

엄마의 꿈을 이뤄주고 싶은 난, 흰 눈 내리는 성탄절보다, 아빠의 자랑이 되기 위해선 세상 제일 예쁜 눈사람을 만들어 보여주는 것보다 차라리 100점 성적표를 달라고 생일 소원으로 빌었다.


나는 너무나 어렸고, 약하고, 서툴러 그 무엇도 돌려줄 수 없었다.

허나 부모는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내어 주려 한다. 심지어 아깝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늘 미안했다. 왜냐면 나는 당신의 시간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면 그 베어 먹은 시간들로, 당신의 찬란한 젊음을 먹고 자라 빛을 가지게 되었다.


엄마는 말했다. 내가 너무 잘 자라줘서 어딜 가도 든든하고 자랑스러웠다고. 아빠는 말했다. 우리 딸이 제일 대단해서 밥은 잘 먹고 다니는 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걱정이 없다고. 먼 곳에서 딸이 잘 살고 있어 줘서 덕분에 본인도 더 열심히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어쩌면 이제야 초등학생 그 시절의 내가 간절히 염원했던 생일 소원을 들어주시는 건가 싶기도 하다.


나는 말한다. 나는 기필코 잘 자라야 한다고. 당신이 한평생 나의 줄기가 꺾일까 모진 비바람에도 감싸 안아주었기에 , 나의 꽃이 고개를 떨굴까 내가 온전히 빛을 볼 수 있도록 허리를 낮추어야 했기에 , 나의 뿌리가 빗물에 뽑혀 슬려 갈까 싶어 뜬눈으로 지새워야 했었기에 그 수많은 낮과 밤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그 존귀한 노고와 시간들을 추모한다.


언젠가 나는 전화통화에서 지금도 꿈이 있냐고 물어봤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루지 못한다 하더라도 마음속 꺼내지 못한 꿈을 물어봤다. 누구든 어릴 적에는 분명 온전히 자신을 위해 이루고 싶은 꿈이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만 이상보단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나이가 들어감을 느끼는 게 어쩌면 인간의 형벌일지도 모르니깐. 세월이 가면 뭐랄까 빛바랜 종이와 희미해진 글자처럼 육체도 꿈도 색을 잃어가고 가련해진다.


나는 말해야 한다. 지금껏 당신이 겪은 그 수많은 고행들이 결코 인간의 형벌이 아니었음을 반드시 증명해 내겠다고. 당신의 청춘이 헛되지 않았음을 나는 입증해야 한다. 그것이 자식이 부모에게 전할 수 있는 유일한 감사이자 보답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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