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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일치

by 열다 Mar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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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작용이 생겼다. 이식편대숙주반응. 이건 다 불일치에서 시작됐다. 골수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에 특정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떡하니. 간지럽거나 하진 않고?"

  "응. 잘 모르겠어. 그냥 조금 보기 불편해서."

  "장갑을 급하게 구해오긴 했는데 이걸로 되겠어?"


  엄마가 내민 건 하얀 면장갑. 온통 빨간 반점으로 덮인 손과 발을 당장 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투정 없이 받았다.


  "발은 수면양말 신고. 마스크는 더 필요하면 간호사가 가져다준다니까 걱정 말고. 립밤 틈틈이 발라."

  "알았어. 엄마 얼른 학교 가."


  초등학교 교감으로 재직 중인 엄마는 바쁜 출근 시간에도 내 호출을 받고 달려왔다. 그래서 더욱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집에 내가 가장 아끼는 연보라색 뜨개 장갑이 있는데.


  사실 그런 걸 다 떠나서 이 면장갑은 장례식을 떠오르게 한다. 마치 내가 곧 죽을 거라는 걸 암시하는 듯해서 소름 끼친다.


  작년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엄마는 의연했다. 엄마와 할머니는 보통의 모녀 관계보다 더 애틋했다. 오히려 나는 엄마한테 그다지 살갑게 굴지도 않고 바쁜 엄마 때문에 같이 보내는 시간도 적어서 데면스러운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할머니 장례식 직후에 내가 혈액암 판정을 받자 엄마는 기절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리고부터는 며칠간 울기만 했다. 엄마랑 닮은 구석이 단 하나도 없는 내가 아플 때 엄마는 왜 그렇게 슬퍼한 건지.


  어쨌거나 경과가 좋지 않아 내일부터 스테로이드 치료에 들어간다. 치료를 한다고 해도 호전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당장 다음 주에 내 자리에 국화꽃이 놓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지금. 내가 죽으면 엄마는 어떻게 되는 거지?


  "유전자 불일치?"


  어린 마음에 매일 혼내는 엄마가 미워 유전자 검사를 의뢰한 적이 있었다. 엄마가 항상 말하기를 아빠는 내가 태어났을 때쯤 돌아가셨고 엄마는 내가 너무 커서 낳느라 고생했으니 앞으로 효도하라고 했었다. 그런데 나는 엄마 친딸이 아니었다.


  나는 충격에 빠져 가출을 했고 엄마는 내 방 청소를 하다가 유전자 검사 결과지를 보게 되었다.


  하필 그날은 장마가 시작된 날이었고 나는 가출한 지 12시간 만에 집에 들어갔다. 엄마는 회초리를 들고 기다리고 계셨다.


  "이런 건 왜 한 거니!"


  그날 처음 엄마의 눈물을 봤다. 나는 종아리를 맞았고 피멍이 들었다.


  "이딴 검사가 무슨 소용이야! 넌 내 딸이야! 내 딸! 넌 그냥 내 딸……."


  드라마처럼 감동적인 끝맺음은 아니었다. 내가 시큰둥했기 때문에. 엄마의 사랑을 깨닫고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그런 엔딩은 나에겐 없었다.


  "누가 엄마 딸 아니래? 드라마 보고 심심해서 따라 해 봤어. 걱정하지 마. 친구 집에서 놀다 온 거니까. 배고파. 밥 줘."


  그날 평생 받을 충격을 다 받았는지 그 후로는 어떤 말을 들어도 놀라지 않았는데, 내 혈액암 판정에도 놀라지 않았는데 엄마가 내 병을 알고 기절했을 때 정말 놀랐다. 엄마는 자신의 피가 하나도 안 섞인 내가 그렇게 중요한 걸까?


  "넌 내 딸인데. 넌 내 희망이고 삶의 의미란 말이야."


  이런 엄마에게 내가 없다면. 밉긴 하지만 건강하게 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드리고 싶긴 했는데.


  스테로이드 치료는 괴로움 그 자체였다. 온몸은 부어올랐고 차도는 없었다. 엄마는 다시 매일 눈물로 내 옆을 지켰다.


  "학교 안 가?"

  "너 놔두고 어떻게 가는데?"

  "교감이 뻑하면 학교 안 가네. 애들한테는 울지 말라고 하면서 자기는 맨날 울고."

  "니가 자꾸 엄마 속 썩이니까 그렇지."

  "나 때문 아니다. 이게 다 불일치 때문이야."


  차도가 없으니 다음 치료를 받을 수 있을 만큼 몸이 조금이라도 견뎌주면 새로 나온 약으로 치료를 시작한다고 들었다. 내가 계속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울보 엄마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엄마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한 마디라도 더 대화하는 것밖에는.


  내가 죽는다면 유언으로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세상에 모든 불일치를 없애 달라고. 불일치는 꼭 엄마를 울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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