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녁거리로 무엇을 사가지고 오셨나요?

by 정윤희

파리 리처드 할아버지 댁에 머문 이후로는 거의 매일 장을 봐서 들어오고 있다. 꺄르푸는 파리 곳곳에서 볼 수 있는 흔한 마트지만, 할아버지는 꺄르푸를 신뢰하지 않으신다. 마트에서는 통 살 것이 없다며 혀를 차시는 시어머니를 이곳에서 다시 뵙는 기분이랄까. 반조리 식품을 사가지고 오는 날은 '뭘 그런 걸 아이에게 먹이냐'는 듯 표정을 찌푸리신다. 차라리 근처 레스토랑을 가라며 이곳저곳 알려주신다. 하지만 외국의 레스토랑 음식에 물릴 대로 물려버렸고, 터무니없는 가격에는 더욱 그런 터라, 도저히 다니고 싶지 않았다.


"저도 한국에서는 반조리 식품을 거의 애용하지 않아요. 하지만 저는 관광객이고 아이는 옆에서 배고프다고 보채는데 다른 도리가 없네요. 밖은 추워 레스토랑보다는 집에 빨리 들어오고 싶은 걸요."


물론 이 말이 유창한 영어로 나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할아버지도 더는 잔소리를 하지 않으신다. 그래도 오늘은 꺄르푸 대신 동네 야채 가게에 갔다. 그곳에서 못생겼지만 빛깔이 고운, 한눈에 봐도 유기농 상품인 큼직한 토마토 세 알을 사 왔다. 디즈니랜드 갈 때 보온병에 담아 가려고 복숭아 넥타도 같이 샀다. 할아버지는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다. 뭐 대단한 칭찬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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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할아버지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동네에 마켓이 열리니 그곳에서 식자재를 사라고 권하셨다. 그러나 그날 아침 나는 몹시 피곤했고 오후에는 미술관 입장이 예약되어 있었다. 채비를 마치고 미술관 가는 길, 횡단보도에서 장을 보고 들어오시는 할아버지와 마주쳤다.


"저녁에 내가 무얼 샀는지 보여줄게요."


그렇게 인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저녁에 할아버지는 시장에서 사 오신 것들을 풀어놓으신다. 직접 따온 듯한 버섯과 야채가 있었다. 하나 같이 못생겼지만 빛깔이 고운, 직접 기른 채소들이었다.


"오늘은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나 좀 도와줄 수 있어요?"


요리에 열의는 가지고 계시지만 프라이팬 사용이 서툴렀던 할아버지는 내게 조리법을 배우고 싶어 하셨다. 이곳에서는 하이라이트를 사용하기 때문에 프라이팬을 예열시키는데 꽤 오랜 시간이 든다. 그 시간을 견디지 않으면 프라이팬은 몇 번 사용하지 않아 금방 들러붙어버릴 것이다. 그래서 충분히 예열시킨 후 기름을 적당량 골고루 코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알려드렸다. 조리를 마치고 몇 번 정도는 설거지 대신 키친타월로만 닦아내다가, 그렇게 몇 번 사용한 뒤 설거지를 하라고 알려드렸다.


나도 뭔가를 도울 수 있어서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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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할아버지는 나의 기준으로는 매우 조촐한 식사를 하신다. 이제 자신은 나이가 들어 단백질 섭취량을 조절해야 한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는 의사가 다량의 단백질 섭취를 권했지만 지금은 나이가 들어 오히려 단백질 섭취량을 적정 수준으로 줄여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냉장고에 붙은, 재료 별 단백질 함유량이 표기된 리스트를 꼼꼼히 체크하시며 재료를 꺼내신다. 야채와 곡식을 드시는데, 야채는 주로 찌시고, 곡식으로는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는 귀리, 혹은 파스타, 소화가 안 되는 날은 쌀밥을 드신다. 간혹 생선도 곁들이신다.


84세이지만 하루에 만보 이상을 걸으시고, 독서도 즐기시며, 무거운 물도 직접 카트로 사 오신다. 마트에서 다른 것들은 거의 사지 않기 때문에 배달을 안 해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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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쪽에서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이 답답하셨는지, 할아버지는 이리 와보라며 가족 사진을 보여주신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할아버지와의 긴 대화를 그냥 듣기 참을 수 없는 재인이는 기회를 봐서 쏙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딸 셋, 아들 하나를 두셨다. 지금은 모두 미국과 멕시코에 살고 있다. 여행을 많이 다니셨던 할아버지는 온갖 나라에서 회화나 조각 작품을 사모으셨다. 일일이 보여주시며 어느 나라에서 온 물건들인지 설명해주신다. 달리 풍이지만 러시아 작가가 그렸다는 회화는 내 마음에도 쏙 들었다. 파라과이에서 온 프란체스코 작은 동상과 성모마리아 동상, 인도네시아에서 온 갖가지 민속 인형, 중국에서 온 뚱뚱한 부처 조각상 등 책상과 선반 곳곳에 작품이 가득했다.


"오늘 내가 추천한 교회에 가보셨나요?"

"아뇨."


여행자보다 여행에 더 열의를 보이시는 할아버지의 기대에 오늘도 부응하지 못했다.


"데카르트를 아시나요?"

"그럼요, 데카르트, 자크 라캉, 미셸 푸코도 알아요."


할아버지의 눈이 동그래지신다.


"미셸 푸코의 글을 이해하시나요?"

"네."


난 대학원에서 푸코의 이론으로 논문을 썼었다. 뭐 다 이해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지만, 일단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까 그 교회에 데가르트의 묘가 있어요."

"아, 정말요?"


무척 놀라운 사실이었지만, 들르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재인이로서는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생가도 모자라 알지도 못하는 무덤까지 차마 같이 가자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철학을 공부했어요. 나중에 내가 쓴 책을 보여줄게요."


내일 저녁, 디즈니 랜드에 다녀온 후 대화 거리가 예약된 셈이다.



202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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