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부터 함께해온, 흔히 말하는 ‘불알친구’들을 만날 때면 묘한 공통점을 발견하곤 합니다. 드라마처럼 기업을 상속받거나 부모의 연줄로 취업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대학을 가고, 치열하게 자소서를 쓰고, 면접장을 누비며 제 몫의 삶을 일궈왔다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친구들의 부모님 성함 대신 ‘직함’을 떠올려 보니 소름 끼치는 규칙이 하나 보였습니다. 자영업을 하던 부모님의 자녀는 지금 사장님이 되어 있고, 부동산을 하던 부모님의 자녀는 부동산 전문가가 되어 있습니다. 대기업이나 공사에 몸담았던 이들의 자녀는 그와 비슷한 규모의 조직에 안착해 있으며, 중소기업을 다니셨던 부모님 아래서 자란 저와 또 다른 친구들은 역시나 비슷한 규모의 기업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강요된 적도, 자리를 물려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삶은 부모님의 궤적을 이토록 충실히 추적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현상을 설명할 길은 단 하나, ‘무의식의 각인’뿐입니다. 아이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세상의 크기를 가늠합니다. 아침마다 나서는 부모의 출근길, 저녁마다 식탁에서 나누는 업무의 고단함, 부모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아이에게는 ‘삶의 표준’으로 자리 잡습니다.
과거 어느 대기업 노조에서 자녀 우선 채용을 요구했다가 사회적 지탄을 받았던 사건이 기억납니다. 당시엔 ‘직장의 세습’이라는 말이 어처구니없게 들렸지만, 지금 보니 그것은 제도적 강제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보여준 세상의 끝이 아이에게는 도달 가능한 유일한 영토이자,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이 되어버린 셈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 때 저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내 직업이, 내가 머무는 이 울타리가 내 아이의 가능성을 가두는 한계선이 될 수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모습이 아이의 뇌리에 "여기까지만 가도 괜찮다"는 무언의 안주를 심어준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일은 아닐지언정 부모로서 참으로 아픈 한계가 됩니다.
저는 제 직업을 사랑합니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성실함의 가치도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제 아이에게 제 삶의 궤적을 그대로 답습하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이 부모에게 머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면, 제가 보여주는 ‘천장의 높이’를 압도적으로 높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아이의 손이 도저히 닿지 않을 만큼 천장을 높여두고 싶습니다. 그 천장에 닿으려 노력하는 과정만으로도 충분히 성장했다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리고 마침내 그 천장을 깨고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는 단단한 계단까지 놓아주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제가 먼저 변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제게 만들어준 천장을 제가 먼저 깨고 올라가는 뒷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삶의 형태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직장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평범한 이름표가 자녀의 내일을 가두는 천장이 될지, 아니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는 디딤돌이 될지는 오로지 부모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제 논리가 오류투성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오류가 저를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게 하고, 제 아이가 더 원대한 꿈을 꾸게 하는 동력이 된다면 저는 기꺼이 이 길을 걷겠습니다.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오늘 자녀에게 어떤 삶을 ‘세습’하고 계십니까? 그리고 당신은 아이들을 위해, 당신 자신의 유리천장을 깨고 계신가요?
부모가 멈춘 곳에서 아이의 성장은 한계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끊임없이 한계를 부수며 나아갈 때, 아이는 비로소 유리천장 너머의 하늘을 꿈꾸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