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ypt | Aswan
카이로가 10세기부터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대륙을 잇는 지역 최대의 도시가 되면서, 사람들은 이집트를 ‘움 알 돈야(Umm al-Dunya, 세상의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런 이집트에서 내가 카이로 다음으로 처음 방문한 도시는 수단 국경에 인접한 이집트 최남단 도시 아스완이었다.
이집트 인구 94%가 나일강 유역에 살고 있듯이 고대 제국부터 현대의 공화국에 이르기까지 나일강은 이집트인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가 없다. 나일강은 아마존강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강으로 아프리카 동부에서 발원한 백나일(White Nile)과 청나일(Blue Nile), 두 줄기의 강이 수단 카르툼에서 만나 이집트를 관통하여 지중해로 흘러간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지중해로 흘러가는 나일강을 따라 나일강 상류인 이집트 남부지역을 상이집트(Upper Egypt), 하류지역인 이집트 북쪽을 하이집트(Lower Egypt)라고 부른다. 그래서 아스완은 상이집트라 불린다.
이집트인에게는 나일강의 흐름이 세계의 방향과 위치를 결정하는 기준이었다.
지구는 우주의 생명체로 끊임없이 외부와 내부의 변화를 겪고 있는데, 인간이 만든 지도라는 이미지가 남과 북이라는 기준을 만들어 내고 단순히 강은 위쪽에서 아래로 흐를 거라고 우리의 사고를 평면적으로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카이로 공항 3 터미널에서 아스완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40분이면 평평하고 건조한 사막으로 둘러싸인 아스완 공항에 도착한다. 아스완은 나일강을 낀 사막에 둘러싸인 도시이다. 공항에 도착한 나는 관광객을 표적으로 택시가 필요하냐고 끈기 있게 물어보는 수많은 이들을 요리조리 피해 공항 밖으로 나갔다. 밖에서는 아까 호객행위를 하던 사람들이 부르던 가격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아스완 시내로 가는 택시를 잡을 수 있었다.
공항에서 아스완 시내로 이동하면 아스완 하이댐을 지나가게 된다. 1960년에 착수하여 10년 만에 완공된 하이댐은 매년 범람했던 나일강의 홍수를 막고, 전력을 생산하는 데 기여했다. 반면, 수천 년간 반복된 홍수로 토사를 실어다 주며 나일 삼각주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었던 자연의 역할 대신, 댐 건설로 인해 최근 나일 삼각주는 수량이 줄어들고 인공 비료 사용이 증가했다. 이집트 고대 신 중에는 나일강의 홍수를 관장하는 ‘하피 신’이 따로 있었고, 파라오 또한 나일강의 혜택과 재앙을 이용해 자신들을 신과 같은 존재로 만들었다.
하이댐을 지나 황량한 사막을 배경으로 이동하다 보면 아스완 시내에 도착한다. 나는 아스완 나일 강변의 코르니시 도로에 내려, 누비안(Nubian)이 많이 거주한다는 엘리판틴 섬(Elephantine Island)으로 들어가기 위한 보트를 찾고 있었다.
누비안족은 아스완 주변과 이집트-수단 국경, 수단 북부 누비아 지역에서 7천 년 전부터 나일강을 터전 삼아 살아온 토착민이다. 그러나 1899년 영국이 이집트와 수단의 국경을 직선으로 그으면서 누비안족의 역사는 이집트와 수단으로 나누어졌다.
1960년대는 이집트 정부의 하이댐 건설로 나세르호가 생기면서 이집트와 수단에 거주하는 12만 명이 넘는 누비안족이 비옥한 나일강 주변의 토지를 떠나 도시나 척박한 남쪽 지방으로 거주지를 이동해야 했다. 아스완에도 누비안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목적지인 엘리판틴 섬에는 누비안 마을이 있다. 하지만 아스완 시내에서 섬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없기 때문에 엘리판틴 섬은 펠루카(범선)나 보트를 타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웰컴 투 이집트!”, “펠루카!!”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려는 관광객을 감지한 여러 명의 펠루카 선장이 나에게 다가와 자신의 펠루카를 타고 선상에서 호텔처럼 지내면서 나일 크루즈를 할 수 있다며 모두들 좋은 가격을 제안하겠다고 한다. 나는 우선 섬에 가서 숙소를 잡아야 한다고 했더니, 선장 중 한 명이 자신도 엘리판틴 섬에 살고 있기 때문에 섬으로 이동하는 배도 숙소도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나는 숙소나 투어를 예약한 상태로 오지 않았는데 일이 쉽게 풀린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펠루카 선장이 소개해준 수상택시를 타고 섬에 도착했다.
엘리판틴 섬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이 선장의 지인이었다. 선장 아저씨는 섬에 도착하자마자 지나가는 지인들에게 물어 숙소 몇 군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숙소는 햇빛이 많이 들지 않고, 배가 들어오는 항구와 가까워 소음도 많았다. 나는 선장에게 친구가 소개해준 누비안 숙소가 있어서, 그곳을 확인하고 싶다고 했다. 그런데도 그와 지인들은 나의 뒤를 한동안 따라오며 그들의 도움을 받기를 강요했다.
수차례의 단호한 거절을 한 후 나는 누비안 전통 양식의 숙소 앞에 도착했다. 하지만 건물 자체에 인기척이 없어서 주변을 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숙소 근처에 섬 절벽 위에 있는 카페를 발견했다. 누비안 양식 건물에 모든 메뉴가 건물 겉에 페인트로 떡하니 적혀있는 이곳 역시 인기척이 없었으나 곧 이집트 청년이 나타나 주문을 받았다. 민트 티를 마시면서 바라보는 엘리판틴 섬과 반대편의 정원, 유유히 흘러가는 나일강은 현재가 멈추고 과거의 시간을 거슬러 여행을 하는 것만 같았다. 혼잡한 거리를 벗어나 배를 타고 겨우 몇 분을 이동해 나일강을 건넜다는 것만으로 이렇게 평화로운 장면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여유롭게 앉아서 나일과 함께 흘러간 역사를 생각하며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까 카페 청년이 숙소 주인 여성을 데려와 숙소를 보여주었다. 방은 누비안 전통 스타일로 꾸며져 있었다. 공동화장실과 공동부엌을 사용해야 했으나 어차피 며칠 지낼 공간이라 크게 문제가 없으리라 생각했다. 시즌이 아니어서 그런지 손님이 한 명도 없었고 주인아주머니는 전체 방 중에 마음에 드는 방을 고르면 방 열쇠를 주겠다고 한다. 나는 넉넉한 그녀의 제안이 선착장 근처에 있던 소란스럽고 어두운 방보다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나는 누비안 집에서 밤에도 잠깐씩 나와서 차를 마시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섬 건너편에 위치한 고대 파라오 왕족 무덤의 화려한 조명을 보자니 누군가의 무덤을 바라보며 이렇게 마음이 편안해질 수 있는 곳은, 세상에서 아스완이 유일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음날 나는 아부심벨을 가는 차편을 알아보기 위해 배를 타고 시내로 건너왔다. 배에서 내리자마자 오늘도 수많은 선장들이 자신의 펠루카를 타기를 제안한다. 그런데, 아무리 거절해도 한 젊은 펠루카 선장이 계속해서 나를 따라온다. 나는 내 갈 길을 가며 연거푸 펠루카 탑승을 거절했다. 포기를 모르는 이 젊은 선장은 내가 아스완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도와주겠다고 자청한다. 이집트에서는 도움을 받기를 강요당하는 경우가 아주 흔하게 발생한다. 특히 아스완에서는.
나는 아부심벨 투어 예약과 룩소르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 위해 시내에 위치한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역에서는 많은 사람이 표를 사기 위해 줄을 서 있었으나, 여성을 위한 별도의 창구를 이용할 수 있었고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상대적으로 빠르게 표를 구매할 수 있었다.
기차표를 예매하고 나니 이제 허기를 채우고 아스완도 돌아볼 겸 이동하는데 이 젊은 캡틴은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간 코샤리(Koshari, 이집트 음식, 쌀, 마카로니, 렌틸콩에 토마토소스, 튀긴 양파를 섞어 먹는 음식, 한국인에게는 토마토 스파게티에 콩밥을 섞어 먹는 듯한 느낌) 식당도 내가 들어가는 여행사 앞마다 기다리고 있다. 심지어 그는 아부심벨에 가는 새벽 투어를 운영하는 여행업자를 나에게 데리고 왔다. 여행사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었는데 캡틴이 데리고 온 아저씨가 차량과 가이드를 포함해 풀 패키지로 30유로에 아부심벨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더 여행사를 알아봐도 비슷한 가격일 것 같아서 나는 돈을 건네고 영수증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아스완 시내에 있는 한 호텔 앞에서 차를 기다리기로 했다.
나는 그래도 오후 내내 힘들게 발품을 팔아 나를 따라다닌 젊은 선장, 모히의 펠루카를 타야겠다고 생각했다. 모히와 흥정을 한 뒤 2시간 동안 배를 타고 200파운드를 주기로 했다. 펠루카 전체에 승객은 온전히 나뿐이다. 갑판에서 강바람을 맞으며 도시와 사막, 유적지를 바라보며 캡틴 모히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설명을 듣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모히는 나일강 물로 컵을 씻고 차를 끓이고 있었다. 다행히 아스완의 나일강은 상류여서 카이로에서 보던 나일 물 색깔과는 다르게 강바닥이 보일 정도로 깨끗해 보인다.
나일강의 석양을 바라보며 생각해 보니 나는 내일 아부심벨에 가기 위해서 새벽 3시에 코르니시 도로로 가야 한다. 그러면 새벽 3시 이전에 배를 타고 섬을 나가야 한다. 모히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지만, ‘과연 새벽에 수상택시가 있을까’라는 칠흑 밤 같은 두려움이 바위로 머리를 친 것처럼 찍어 내렸다. 모히를 통해 엘리판틴섬에 위치한 5성급 호텔은 새벽에도 1시간마다 섬과 코르니시를 연결하는 배가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나는 펠루카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호텔 리셉션에 찾아갔다. 나는 깔끔하고 멋지게 차려입은 리셉셔니스트에게 호텔 투숙객은 아니고 호텔 바로 뒤편에 있는 숙소에 묵고 있는데 아부심벨을 가기 위해 새벽에 섬 밖을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리셉셔니스트는 으리으리한 5성급 호텔만큼 온화하고 여유로운 미소로 원래 호텔용 보트는 호텔 숙박객들을 위한 시설이지만 특별히 호텔 뒷문으로 들어와 보트를 타고 시내로 나가도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호텔과 연결된 섬 서쪽에는 가로등이 없는 절벽이고 새벽에 사람은 없겠지만 여우나 야생 동물이 나올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주었다.
숙소로 가면서 나는 새벽에 페리를 타고 시내로 나갈 수만 있다면 불빛이 없어도 휴대폰을 사용하고 야생동물도 내쫓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숙소로 돌아가면서 처음 아스완에 도착했을 때 만났던 펠루카 선장을 만났다. 그는 왜 본인의 호의를 피하고 자신의 펠루카 대신 모히의 펠루카를 탔냐고 항의했다. 내가 다른 선장의 펠루카를 탄 것이 소문난 것을 보니 확실히 작은 동네이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그는 여전히 펠루카 타기를 강요하며 몇 명의 남성들과 함께 내 뒤를 쫓아왔다.
숙소의 큰 방과 마당, 화장실, 숙소 전체에 오로지 나뿐이다. 여러 명의 남자들이 따라오는데 숙소 전체에 나 혼자 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무서웠다. 나는 숙소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들을 늘어놓으며 내일 아부심벨을 가기 위해 새벽에 나가야 하는데 혼자 숙소에 있기가 무섭다고 말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내가 있는 곳으로 와 자택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리고 흔쾌히 그녀의 자녀 방에서 자게 해 주었다. 쑥스러움이 많은 그녀의 딸, 파티마도 나에게 깨끗한 침구를 가져다주고 그윽하고 큰 눈동자로 배시시 웃으며 불편함 없게 나를 챙겨주었다. 엘리판틴 섬의 누비안 숙소에 묵으려고 했던 나는 정말 누비안 가족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 것이다.
숙소 주인아주머니와 파티마는 새벽 2시까지 깨어 있다가 내가 배 시간에 늦지 않도록 깨워주고 호텔 근처까지 동행해 주었다. 그리고 호텔 선착장으로 가서 페리를 탈 수 있었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코르니시에 위치한 호텔 앞으로 왔으나 약속시간이 지나도 픽업 차량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영수증에 적힌 여행사 번호로 수십 번 전화를 걸었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위로가 되는 것은 약속 장소에 나 이외에도 다른 여행객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함께 언제 올지 모르는 차를 기다리는 막막한 처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같이 기다리던 무리에서 누군가가 경찰의 허가를 받느라 차가 늦어지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신기하게도 다들 투어로 낸 비용이 달랐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200~300파운드에 버스를 예약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나는 2배의 값어치를 내는 사기를 당했다. 미리 사전 조사를 충분히 하지 않았다며, 아부심벨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하루의 시작을 무심히 알리는 일출을 보며 억울한 마음을 내려놓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도착한 거대한 신전인 아부심벨은 현재의 장소로 한차례 이동한 역사가 있다. 아스완 하이댐 건설은 자연과 누비안의 삶에만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라 문화 유적에도 영향을 미쳤다. 댐 건설로 인해 수장될 위기에 놓인 많은 유적지를 옮겨야 했는데, 유구한 강물 속에 잠길뻔했던 아부심벨도 그중 하나이다. 1960년대, 댐 건설로 인해 아부심벨이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8년에 걸쳐 유네스코와 여러 국가의 국제적인 원조로 지금보다 높은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바위 절벽을 깎아서 만든 신전인 아부심벨은 람세스 2세 대신전과, 네페르타리 왕비를 위한 소신전으로 나뉜다. 신전을 1만 6천여 개 조각으로 분할한 뒤 재조립하였다고 하는데, 람세스 2세 좌상을 자세히 보면 잘렸다가 붙여진 흔적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외에 문화유적을 발굴할 수 있는 가능성은 하이 댐 건설과 함께 나세르 호반에 사장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 역시 고대 이집트 문명에 대한 환상을 품은 어린 시절이 있었다. 김동화 작가의 순정 만화 ‘천년사랑 아카시아‘에서 고대 이집트 여성들의 아름다움과 질투, 사랑을 느꼈고, 3천 년 전에 제작된 투탕카멘 황금 마스크가 부산박물관에 순회 전시되었을 때 정교하고도 화려한 다양한 고대 이집트 유물에 감탄했었다. 극장에서 보았던 할리우드 ‘미라’ 영화를 통해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에게 단순히 책과 화면에서 보는 이미지나 사진 이상의 생동 있는 각인 같은 것이었다.
대신전의 람세스 2세 4개의 좌상 앞에는 한 좌상의 떨어진 얼굴이 몸체 앞에 세월과 자연에 항복하듯이 놓여있다. 고대 이집트 유물은 볼 때마다 상상력을 자극한다. 반만년 전의 인간의 삶과 능력과 기술. 대신전 안 벽면의 부조는 여전히 몇 천 년 전의 색감이 남아있는 전투 장면과 종교의식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교육 차원에서 어릴 때 아이들이 이런 문화재를 접하면 창의성이 커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말이지 흔치 않은 기회로 카이로에서 1파운드(£E) 신권을 몇 장을 가지게 되었다. 현금사용이 많은 이집트에서 신권을 특히 1파운드 지폐를 보기는 드문데 나는 신권은 쓰지 않고 보관하였다가 한국에 가서 오랜만에 만나는 조카들에게 줬다. 이집트 1 파운드는 동전과 지폐가 있는데 지폐 뒷면에는 아부심벨 대 신전이 그려져 있다. 1파운드는 한화로 100원이 채 안 된다.
하지만 조카들이 제발 그 화폐의 실제 가치를 가치로 여기기보다, 더 큰 상상력과 꿈을 가지고 이어가기를 기원해 본다. 세계지도와 지폐 한 장은 사각 면으로 끝나지만, 실제 세계는 편편하지 않고 뻗어서 연결되듯이. 우리의 삶이 나일강처럼 계속 흐르듯이. 흘러간 강물은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한번 지나가면 이별통보를 하는 연인처럼 붙잡을 수도 애원할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