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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2 셰프 샤우엔 |
유랑자의 목적

Morocco | Chefchaouen

by Wonderer Wanderer

“여행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인생의 한 번쯤

셰프 샤우엔을 가고 싶어 한다.”


탕헤르에서 버스를 타고 셰프 샤우엔으로 이동했다. 내가 탄 버스는 시간을 걸쳐 점점 더 높은 지대로 구불구불 이동하고 있었다. 셰프 샤우엔은 산 중턱에 얼기설기 푸른색 건물이 자리 잡은 산촌으로 모든 집을 파란색 페인트로 칠한 ‘스머프 마을’로 유명하다.


셰프 샤우엔에 도착해서 숙소를 잡기 위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몇몇 숙소를 둘러보고 숙소 수준과 위치, 가격을 확인한 후 조용한 골목 안에 위치한 역시나 파란 페인트가 칠해진 적당한 호텔을 선택했다. 셰프 샤우엔은 작은 산촌으로 마을 전체를 돌아보는데 2~3시간이면 충분하다. 마을의 중심인 그랜드 모스크(Grand Mosque)와 광장 주변으로 행상인과 식당, 카페가 즐비해 있다. 셰프 샤우엔은 유명 관광지답게, 숙소 주변으로 여행사를 비롯해 식당들이 여행자를 위한 다양한 언어로 적힌 메뉴를 내놓고 있다. 또한, 이국적인 모로코 스타일 카페와 앤틱 가게, 비누와 향신료를 파는 가게들이 골목마다 자리 잡고 여행객을 유혹하고 있었다.


2008년 시작한 인도 여행 이후로 나는 돈과 시간의 여유를 만들어 내서 끊임없이 여행을 떠났다. 지인 중 한 명은 “저렇게 살면 정말 후회가 없겠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20대 시절 나는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딱히 여행 이외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의 중심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전공을 부모님의 권유, 친구의 추천으로 선택했다. 특출하게 잘난 것도 없고 남들이 열심히 쌓아놓은 스펙을 보면 부모님을 떠올리면 아직도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있는 내가 한심스럽고 죄를 짓는 것 같았다. 삼시 세끼 걱정 없이 몸 누일 곳 있어서 이런 생각에 빠져 있구나라며 나를 다그치기도 하고,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냐는 고민 속에서 물에 젖은 이불처럼 축 쳐져 있었다. 대학 이름과 자격증으로 한 존재의 가치를 판별하고 직업보다는 직장이 최우선인 한국 사회에서 나 자신을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기는 쉽지 않았다.


난 끊임없이 주변의 시선에 떠밀린 선택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행은 유일하게 내가 갈 목적지와 어디서 잠을 자고 먹을지를 선택하는 온전히 내가 나의 향방을 정하는 순간이었다. 대학 졸업이나 취직보다 여행 계획이 우선이던 내 정신은 안드로메다에나 있을 법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하다. 여행은 돈이나 시간의 문제라기보다 용기의 문제이이다.


내가 여행을 하는 이유,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행을 통해 길을 걸으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존재가 됨을 느끼기 때문이다. 여행 중 남루한 내 모습을 보며 내가 무슨 보부상도 아니고 내 업보처럼 이 짐을 옮기고 다니고 있냐라고 생각하다가도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데라며 다시 배낭을 이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 간혹 낡고 삐걱거리는 듯한 숙소에서 ‘내 한 몸을 눕혀서 잠을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야’라며 호강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도대체 나는 왜 이 고생을 사서 하고 있단 말인가. 집 나오면 고생이라고 했던가 지난 10년이 넘는 시간을 외국을 오가며 여행하고 공부하고 일하는 건 끊임없는 사건과 사고의 연속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휴대전화를 버스에 두고 내려 말도 통하지 않는 포르투갈의 작은 어촌 마을버스터미널에 매일 출근해 휴대전화의 행방을 찾아, 결국 같은 버스를 통해 휴대전화가 나에게 돌아오기도 했고, 에어비앤비 숙소 열쇠를 잃어버려, 여행 중 열쇠 집을 찾아 전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수많은 공항과 기차역의 불편한 의자에서 잠을 자기도 했고, 비행기를 놓치거나 탑승을 거부당하는 일은 물론이고. 몇 차례 공항에서 부친 짐이 도착하지 않아 분실 신고 후 무작정 며칠간 갈아입을 속옷도 없이 짐을 기다려야 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집시에게 여권과 지갑을 몽땅 소매치기 당해 난민 신세로 대사관 영사과를 기웃거려야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가장 심란하게 만든 것은 무시무시한 운전 기술을 소유한 운전기사에게 내 목숨을 맡기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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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은 일정한 거처가 없이 정처 없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을 뜻한다. 사람들이 저마다 여행하는 이유는 다르겠지만 분명한 건, 여행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인생의 한 번쯤 셰프 샤우엔에 가고 싶어 한다. 어느 방향으로 사진기를 들이대기만 하면 환상적인 사진이 만들어진다. 나 역시 산속에 자리 잡은 동화 같은 파란 마을인 셰프샤우엔을 오랫동안 가보고 싶어 했다.



유랑자의 목적


셰프 샤우엔의 구불구불한 골목 구석구석을 구경하는 것도 매력이 있지만, 셰프 샤우엔 전경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려면 발품을 팔아,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 나는 좀 더 멀리서 셰프 샤우엔을 보고 싶어 마을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을 오르기로 결심했다. 산을 오르면서 산을 타고 내려오는 차가운 계곡물에 오렌지를 둥둥 띄워서 시원한 오렌지를 짜주는 간이 주스 가판대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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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를 끼고 있는 북아프리카 국가와 스페인, 이탈리아 같은 남유럽 국가에서 갓 짜낸 오렌지 주스를 마시고 나면, 그동안 마트에서 사서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다시는 마실 수 없게 된다. 직접 오렌지를 짜서 만든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마시면 평생 마시던 그 오렌지 주스가 오렌지 향과 오렌지 맛 가루를 탄 물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산줄기를 타고 내려온 차가운 물에 담겨있던 오렌지로 짜낸 주스가 뿜어내는 육즙과 향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신선한 오렌지 주스를 단숨에 들이켜고 숨을 고르고 다시 산을 올랐다.


1920년대 스페인인에 의해 지어졌다는 스페인 모스크(Spanish Mosque)에 이르면 셰프 샤우엔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자락에 오목조목 들어앉은 파란 집을 보고 있으면 동화 속 마을이나 별천지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이왕 올라온 김에 ‘엘마 산’(Ras Elma) 정상까지 올랐다. 쾌적한 바람과 산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시원한 물소리가 푸른 건물과 산맥과 장관을 이룬다. 계곡에는 외국 여행객 이외에도 현지인 가족 단위나 커플들이 물놀이를 있는데,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니 왠지 정겹고 한국 시골 산속 계곡에 피서를 온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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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스페인 바르셀로나, 이탈리아 베네치아 등지에서 과잉 관광 문제 해결을 위해 관광세를 부과하거나, 주민들이 관광객 내쫓는 시위를 벌이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 관광객이 현지인 주거지에 머물면서 주변 주택 가격과 물가를 상승시키고 현지인의 삶을 위협하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관광지를 압축적으로 돌아보는 혹은 사진을 찍고 빠지는 여행이 성행하고, 박물관, 무덤, 성지를 방문하려면 예약이 필수가 되어가고 점점 더 상업화된 형태로 바뀌고 있음이 느껴진다. 여행을 갔다면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을 만나야 한다. 화려한 궁전과 위대한 신전, 현대 건축물을 봐도 그곳에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과 교류보다 감동적이지 않다.


숙소 근처에 위치한 주스 가게에 들러 오늘도 다름없이 오렌지 주스를 주문하려는데, 가게 주인 유세프는 묻는다. “오늘은 오렌지 주스 말고, 아보카도 주스를 마셔보는 어때?” ‘아보카도로 주스를 만든다고… 과일이든 채소이든 몸에 좋을 테니 한번 시도해 보지 뭐’ 그렇게 난생처음 마셔보는 100% 아보카도 주스는 생각보다 맛있다. 나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현지 사람들이 찾는 가판 시장을 들렀다. 장기 여행하면서 부엌을 사용한 지도 오래되었고 신선한 과일이라도 조금 더 먹으려는 생각이었다. 나는 과일과 야채를 몇 개를 주워 담으며 아주머니에게 무게를 재달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계산하시며 내가 고른 과일이 얼마 안 된다면 계산을 치르고 나서 비닐봉지에 과일이고 오이고 몇 개씩 더 넣어 주신다. 여행자들이 많이 오가는 거리에서 몇 골목만 벗어나면 여행자 거리에서는 느낄 수 없는 현지의 정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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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나는 길에서 친구들, 처음 만나는 이들, 많은 사람에게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 내 20대 초반은 길에서 나라는 이방인을 맞아준 수많은 사람이 없었으면 존재할 수 없었다. 지금의 나는, 그 사람들과 그 시간이 없이 지금의 모습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여행은 한 번도 나를 배신하지 않고 내가 자리 잡은 곳을 떠나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자기 성찰의 시간을 주었다. 나에게 여행은 새로운 세상과 사람, 문명과 도시, 자연을 품은 지구를 온몸으로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스승이었다. 내가 사랑하는 것은 새로운 세상, 사람을 만나는 것인데, 여행은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려준다.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 일을 해보아야만 한다. 나는 5성급 초 호화 호텔에서도, 천장도 불도 없는 사막과 바다에서도, 그 상황과 수준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않고,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지만 만족할 수 없는 사람, 아무것도 가진 것 같지 않지만 그 상황에 적응해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불편함 없이 개개인의 인격, 성격, 경험을 존중하고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내가 여행을 하면서 알게 된 나 자신이다. 그동안 여행을 하면서, 세상에서 어떠한 것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없고, 가지고 보고 싶다고 가질 수 없고,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


삶은 짧고 단순하다. 누구나 죽는다. 죽음은 선택이 아니기에.


그렇다면 편안한 삶에 안주할 것인가? 용기를 낼 것인가? 나는 이제 나를 안다. 나는 항상 여행하는 것처럼 도전하며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받았던 돌봄과 사랑을 누군가에게 항상 나누고 싶어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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