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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6 | 이방인의 삶, 향수병과 출애굽기

Egypt | Cairo

by Wonderer Wanderer


출애굽 결심,

난 이집트를 떠나야 한다.



나일강, 사막, 돌산과 같은 자연을 끼고, 빼곡한 아파트와 역사를 머금은 건축물들, 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카이로는 압도적이다. 누구나 오래된 이 역사의 땅에 발을 내디디면, 도시의 규모와 인구, 도시가 내뿜는 오염과 소음, 사람들의 흥과 웃음, 고함과 울음에 온몸이 반응할 것이다.


누군가 카이로의 중심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이 주저 없이 ‘타흐리르 광장(Tahrir Square)’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2011년 1월, 20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약 30년간 이집트를 통치한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대통령을 물러나게 한 장소이며, 2021년 4월 3일 이집트 국립 문명박물관(National Museum of Egyptian Civilization)으로 ‘황금 마차’를 타고 화려하게 옮겨간 파라오 미라 22구가 거주했던 ‘이집트 박물관’도 타흐리르 광장에 있다. 타흐리르 광장을 중심으로 뻗은 카이로 시내는 유럽 풍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건물에 먼지와 매연에 쌓여 있지만 화창한 날에 타흐리르 광장과 시내를 걸으면 마치 유럽의 어느 도시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타흐리르 광장의 오벨리스크
타흐리르 광장에 위치한 이집트국립박물관


화려한 역사와 함께 인간, 자동차, 뚝뚝, 말, 동키, 낙타까지 뒤섞인 이 거대한 도시의 정제되지 않은 혼잡함은 마치 화려한 과거를 상실한 비틀린 현실이 혼란스러운 젊은이 같다. 카이로에서 차들이 경적을 울리는 것은 사람이 숨을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일이다. 차가 울리는 경적은 주로 ‘존재의 알림’이다. 온몸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길을 지날 때마다 ‘내가 지나갈 테니 당신은 멈추라’는 의미로 경적을 울리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골목길을 지날 때도 경적은 요란하게 울리되 절대 속도는 줄이지 않는다. 도시 중심지에 줄지은 차들이 제각각 울리는 온갖 경적이 합동을 이루는 곳에서 다양한 차의 경적은 오케스트라를 필하모니를 연상케 한다. 필경 카이로 중고차 시장에서 가장 큰 결함을 가진 차는 클랙슨이 고장 난 차일 것이다.


카이로는 지하철 3호선까지 주요 지역 이동이 가능하고 버스 노선도 존재하지만, 많은 현지인은 봉고 승합차인 마이크로버스를 이용한다. 미터기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화이트 택시가 있지만, 관광객은 바가지를 쓸 가능성이 높고 우버(Uber) 등을 이용해서도 어느 곳이든 쉽게 이동할 수 있다. (이집트에선 거스름돈과 팁을 위해 항상 잔돈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카이로 주요 도로는 출퇴근 시간에 엄청난 차들로 빼곡히 들어찬다. 이집트는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큰 도로에서도 대개 사람들이 무단횡단을 할 수밖에 없다. 길을 건널 때는 반드시 좌우를 잘 살핀 후 건너야 하는데, 도로에 따라 위협적인 속도와 무질서로 덮치는 차량의 행렬을 보면 과연 내가 이 도로를 건널 수 있겠냐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장 쉬운 방법은 현지인을 방패 삼아서 건너는 것이다.


첫 카이로 방문 시 흔쾌히 자신의 빈방을 숙소로 제공해 준 친구 에스더는 나에게 물었다.


“이집트 어때? 이집트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뭐라고 표현하겠어?”

“모든 게 다르게 새로워. 굳이 한 단어를 선택해야 한다면…"

"음, 동공 확장(Eye-widening)?”

"아, 그리고 카이로 교통은 심장마비(Heart attack) 그 자체야"


“에스더, 아까 내가 다리 밑에서 도로를 건너려고 멀리서 다가오는 차의 운전사를 쳐다보며 무단횡단을 시도했어. 나 지금 건너가니깐 조금 속도를 줄여주리라는 마음으로 말이야. 근데 차가 점점 가까워지고 그 운전사는 내 눈을 쳐다보면서도 절대 속도를 줄이지 않는 거야. 나 거의 차에 치이는 줄 알고 완전 무서웠어.” 말했더니 그녀는 깜짝 놀라 대답한다.

“무단횡단을 할 때는 차가 어느 정도 속도로 다가오는지, 멀리 있는지를 확인하고, 운전사를 쳐다보지 않고 건너편 도로를 보고 건너야 해. 그게 안전한 무단횡단 방법이야”

‘어떻게 그게 안전한 방법일까’라는 표정으로 의아해하는 나에게 에스더는 덧붙였다.

“네가 운전사를 쳐다보지 않으면 그는 속도를 줄이며 달리고, 운전사를 쳐다보면 운전사는 네가 본인을 확인했다는 생각으로 속도를 줄이지 않고 도로를 달릴 거야”


당시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나름 법칙이라고 한다면, 현지 법칙이었다.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모스크의 아잔(기도시간을 알리는 소리)과 자동차와 뚝뚝, 말이나 동키까지 카이로 도로의 소음이 배음이 되어 버린 것처럼, 어느새 경주하는 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를 뚫고 현지인을 방패 삼아서 6차선 도로를 건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카이로는 한편으로 혼잡하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 무질서 안에도 그들만의 규칙과 법칙이 존재한다.


누군가 산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라고 했던가, 카이로는 세월이 켜켜이 쌓여 낡은 듯한 인생으로 가득 차 있다. 사막에 둘러싸인 지리적 조건 이외에도 인간이 발생시키는 대기오염이 대기권에 스모그로 쌓이는 듯하다. 특히, 3~5월 사이가 되면 아랍어 숫자 50을 의미하는 ‘캄신(Khamsin)’이라 부르는 모래바람이 분다. 주변이 뿌옇게 한두 시간 동안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때도 있다. 창문을 닫지 않는 우버 기사의 차에서 코, 입과 눈으로도 모래가루를 느낄 수 있다. 봄기간에 약 50일간 부는 캄신이 오면 하늘은 황토색보다는 마치 이글거리는 화성의 표면 같은 주황색과 황토색이 겹쳐진다. 때로는 세상의 종말이 온 것 같이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견디기 힘든 고통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익숙해지기 마련인 것처럼, 이집트인들은 종전과 다름없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연 강수량 25mm인 카이로에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오래된 거대한 도시가 멈춰버린다. 심지어 10~20mm의 비가 와서 학교 휴교령이 내린다. 이집트의 연 강수량은 5mm로 워낙 비가 오지 않거나 적은 양의 비가 내려 배수 시설이 없다. 그래서, 비가 오면 아이들은 밖에 나와 비를 맞고 깔깔거린다. 하지만, 배수 시설이 없기에 비가 마르지 않는 이상 일부 침수된 도로는 며칠째 물에 잠긴다.


나는 카이로에서 코로나를 겪으면서 내가 노력하지 않았지만, 태생적으로 가진 것과 이 세상에서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떨어져야만 하는 난민들, 전쟁의 두려움으로 살아가는 내전 국가에 남아있는 사람들, 본인의 땅과 거주지에서 격리된 구역에 살아가고 있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 세상 한편에서는 마트에서 사재기하며 화장지 확보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오랜 전쟁과 기아로 고통받는 있는 이들.


카이로에서 코로나블루와 공황을 겪고 나서야 나는 마음도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숨쉬기도 운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민병에 걸리면 이민을 가봐야 하고, 향수병에 걸리면 고향에 돌아가야 한다고 했던가. 나는 2021년 첫 번째 출애굽을 결심했다. 하지만 나는 이집트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이었다.


코로나 시기, 카이로 시내 카페(Zahret Al Bostan, 1919부터 영업)의 벽화(문화예술체육계 인사 벽화로 유명)



경계인의 삶과 향수병


세계는 자유무역과 장벽철폐라는 이름으로 각국의 벽을 무너트리고 자본과 서비스를 이동시키다가, 코로나 19와 같은 질병과 반테러 강화를 목적으로 국경을 봉쇄, 격리하고 국경경비를 강화했다. 그리고 몇 달 뒤 저녁시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카이로는 점점 일반적인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전 세계 해외 이주민은 2억 8,100만 명에 달한다. 국제연합 인구국(UN Population Division)은 ‘국제 이주민’을 ‘자신의 출생국이나 시민권 국가 이외의 나라에서 12개월 이상 체류하는 사람’으로 정의하고 있다. 2019년에 1억만 명 이상이었던 이주민은 4년 만에 두 배 넘게 늘어 2억 8천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떠나 이방인으로 살아간다. 전 세계는 어느 때보다 일, 가족, 결혼 등 다양한 여러 가지 이유로 본국을 떠나 이동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난 10여 년간 길거리에서 ‘시누와즈’, ‘씨니’, ‘니하오’라는 말을 들으며 살아왔다. 때론 환하게 웃으며 ‘꼬헤’, ‘코리아’, ‘코리안’, ‘꾸리’라고 대꾸하기도 하고, 때로는 무시하기도, 간혹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지만 참았다. 하지만, 이젠 카페나 식당에 앉아 나와 다른 모국어를 가진 사람들과 둘러싸여 앉아있는 것이 너무나도 익숙하게 느껴진다. 외국에 정착한 교민들의 어려움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이방인’으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나의 선택과 삶.


우리가 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미워하는 점은 그들과 우리의 다른 점이다. 하지만 문명의 흥망성쇠처럼, 매일 뜨고 지는 해처럼, 인간인 우리는 차이를 혐오하면서도 차이를 숭배한다.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어느 편이냐에 따라서. 한국이 좀 더 다양성을 인정하고 보듬어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 바로 주변에 새터민, 외국인 노동자, 난민 등, 더 건강한 사회와 국가를 찾아서 한국을 선택해서 이방인으로 더 나은 사회를 꿈꾸며 만들어가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나일강 물을 마시고 나면 다시 이집트로 돌아오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2017년 1월을 시작으로 나는 계속해서 카이로로 돌아왔다. 나는 모든 이주민이 정치적, 경제적인 이유만으로 이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때로는 공간이 주는 정체성과 문화, 공간에 대한 사랑과 감정도 분명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때로는 같은 장소를 다른 시간대에 여행을 할 수 있는 운도 많았는데, 같은 장소를 간다고 해서 똑같은 느낌을 받지는 않는다.


마디, 도끼, 자말렉, 헬리오 폴리스, 모카탐, 뉴카이로, 칸 엘 칼릴리, 시타델, 죽은 자들의 도시, 쓰레기 마을, 기자 피라미드. 수없이 방문했던 역사와 삶과 문화가 녹아있는 카이로의 많은 지역과 장소들.


2019년 2월 의도치 않게 이집트를 떠나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집에 가는 지하철 여성 전용칸 문 근처에 서서 지하철 노선도를 보며 카이로 지명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카이로 지하철 객차 중간인 네 번째, 다섯 번째, 두 칸은 여성 전용칸이라 행상인이나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는 객차 승객이 여성이다)


막상 이집트를 정리하고 떠나려고 생각하니 당장 계약 해지금을 물어야 하는 아파트부터 시작해서 이집트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까지 생각이 났다. 내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니 갑자기 옆에서 계시던 아주머니부터 시작해서 내 주변으로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의 일이라면 관심이 많은 이집트인답게 한 마디씩 건넸다.


“아니, 아름다운 젊은 아가씨! 무슨 일이 있어서 우는 거야!”

“무슨 일이에요?”

내 허리 정도까지 오는 꼬마 아가씨부터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나를 안고 휴지를 건네며 말을 시키다 보니 나는 흐르던 눈물을 삼키며 대답했다.

“나는 이집트를,, 그리고 이집트인을 정말 사랑하는데, 이집트를 떠나게 되었다”


그랬더니, 옆에 서 있던 한 젊은 여성이 통역을 했고, 이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십시일반, 여성 칸에 탄 많은 여성들이 내 주변을 감싸고 휴지를 건네고 내 몸을 쓰다듬기도 하며 한 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지하철에서 생전 처음 만난 한 아주머니는 나에게 “우리는 너를 사랑해, 넌 이집트에 돌아올 거야!”라고 말했다. 그러자 같은 칸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I love you”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때 이집트 여성의 오지랖과 친절함에 웃으면서 눈물을 닦아내고 무슨 일이 있어도 카이로에 머물러야겠다고 생각했다.

2020년 초부터 코로나와 더불어 나는 여러 차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존재와 이별과 상실을 겪었다. 내가 아무런 조치도 취해볼 수 없는 죽음과 현실과 나의 결정으로 인한 이별까지. 사랑하는 존재를, 장소를 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 떠나보내야만 한다는 건 가혹한 일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적어도 내가 베푼 사랑보다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젊은 시절 누구에게 그리움으로 남는 사랑을 했었다는 것만큼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라고 할 수 있는 것 같다.


카이로,

하비비(Habibi, 내 사랑),

하야티(Hayati, 나의 삶).


2021년 첫 번째 출애굽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집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피해 지인들에게 "이집트에 다시는 안 가" "나 여권도 갖다 버렸어. 이제 외국 다시는 안 가, 나는 여행도 국내여행, 결혼하게 되면 허니문은 울릉도, 독도로 갈 거야"라고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수십 번도 넘게 선언을 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정말, 그냥 괜찮아져서"라는 이유로 다시 여권을 신청했고 카이로에 돌아왔다.


나는 그렇게 카이로를 다시 돌아와 2025년 초부터 또 한 번의 출애굽을 준비했다.

카이로는 나에게 애증 그 자체이다. 내가 사랑하는 도시, 내가 증오하는 도시, 모든 걸 누릴 수 있는 도시, 아무리 노력해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배운 곳.


카이로에 거주한 지 5년이 되어서야 나는 알게 되었다. “인샤알라”의 뜻을. 나 자신을 내려놓고, 신의 뜻에 맡기는 것.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 나를 맡기고, 나 자신을 비우고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을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


이집트는 나에게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고, 나는 카이로에서 사랑과 인생을 배웠다.


카이로에서 우울해서 잠을 못 이루던 밤, 나는 무수한 날을 매일 해가 지고, 달이 뜨고, 달이 지고, 해가 뜨는 날이 겪었다. 그때 나 자신에게 무수히 되뇌던 한 문장, 그리고 한국행을 결심하고, 또 우울증 치료를 받겠다고 결심했던, 거기까지 갈 수 있게 나를 견딜 수 있게 해 줬던 한 문장이다.


"오늘 어두워지고 나면, 내일은 해가 뜰 거야."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개역개정 성경, 시편 30절 5)"


사랑으로 고통으로 아무리 잠이 들 수 없는 밤이라도 내일은 해가 뜬다. 신마저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나는 오늘도 나일강과 벽돌건물, 4천 년 전 인간이 남긴 건축물과 매연과 소음과 사람 사이에서 해가 지는 것을 보며 감사하게 된다. 우리는 그간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깎이고 닦이고 부서지고 무너졌다. 내가 좀 더 빨리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때문이었다.


나일강 펠루카(범선)


내가 카이로에서 좋아하는 것은 칸 엘 칼릴리, 엘 피샤위 카페에서 민트를 넣은 차와 후카(물 담배)를 맛보기, 텐트 장인 시장(Tentmaker’s Souk)에서 수공예품을 구경하며 킬림(Killim, 이집트 카펫) 가게에 기웃거리기, 쿠나파(kunafa)나 옴 알리(Om Ali, 견과류가 들어간 이집트 디저트)를 먹으며 달콤함에 빠지기, 시타델에서 뿌연 카이로 시내를 바라보기, 모카탐 바위산에서 카이로 전경을 즐기며 아후와(커피) 마시기, 사람 많이 없는 시간에 알 아즈하르 파크에 가서 마음껏 걷기, 외국인 주거지역 마디에서 금요일 기도일 아침 일찍 자전거 타기, 그리고 좁고 거친 골목들 사이에서 이집트인과 고양이 만나기 등 다양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좋아하는 것은 나일강에서 펠루카를 타고 혼잡하고 소란스러운 하루를 마무리하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 거대한 도시의 하루가 저물어 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제일 좋다.


모카탐 언덕에서 바라본 카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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