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라쿠프 기행] 유대인들의 힙스터 성지

<카지미에시 광장>, 한때 유럽에서 가장 많은 유대인이 모여 살던 곳

by 흑투리


유럽 여행을 하면, 특히 중부 유럽이나 동유럽을 가면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민족이 있다. 바로 '유대인'이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한국인 독자들, 여러분은 유럽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종교가 무엇인가? 당연히 기독교랑 가톨릭일 것이다. 하지만 유대교? 생소할 것이다. 그런 종교와 민족은 이스라엘 같은 중동 국가에나 있을 법한 느낌이 드니까.



그렇지만 유대교,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은 우리가 사는 지구의 유럽 대륙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것도 지리적, 역사적으로 많이.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 속에는 매우 슬픈 비하인드가 담겨 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이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받은 수모는 단순히 홀로코스트 하나가 전부가 아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하면서 일부 유대인들이 유럽 대륙 여기저기에 게토를 형성했는데, 기독교가 우세였던 유럽인들은 원래 그들을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결론만 말하면 유대인들은 유럽 대부분의 나라에 각자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갔다. 그래서 앞으로 투리의 기행글을 보면 유대인과 관련된 관광지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번 글은 그 공동체들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지역, '카지미에시 지구'에 관한 얘기를 할 예정이다. 본래 차별과 학살의 현장이었던 곳에서 힙하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한 이 지역. 이곳에는 과연 어떤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것일까?






카지미에시 지구에 도착한 ESN 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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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의 앞쪽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것은 사진 위의 원형 건물이었다. 이전에 '카지미에시 지구'를 쳤을 때 저런 모양의 건물 사진을 본 기억이 있는데, 벌써 도착한 것이었다. 시간표를 확인해 보니 원래 오후 2시에 도착하는 것으로 나와 있어서, 그렇게 빨리 온 편도 아니긴 하다.



저 원형 건물 근처를 자세히 보니, 음료수나 폴란드 버전의 피자 바게트 자피에칸카 가게 등 여러 먹거리 상점들이 운영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 투리는 화장실을 가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화장실은 보이지 않았다.



20250322_144450.jpg 건물 앞에는 저렇게 옛날 음반들을 파는 공간도 있었다!



현재 투리 일행이 있는 곳은 정확히 말하면 '플라츠 노비(Plac Nowy) 광장'이라고 하는 구역이다. 아래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이곳은 원형 건물과 그 뒤의 여러 시장들이 자리 잡고 있다. 주중에는 지역 주민이 신선한 농산물이나 식료품을 파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가 이곳을 방문한 날짜는 토요일. 이 날에는 골동품, 옷, LP 레코드판, 도자기 등 여러 가지의 중고품과 지역 특색이 있는 물건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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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의 시장 모습



카지미에시 지구는 원래 1335년 카지미에시 왕에 의해 독자적으로 생긴 지역으로, 폴란드의 유대인 거주 지역으로 집중적으로 발전하던 곳이었다. 15세기에 이르러, 이곳에 수천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게 됨에 따라 독자적인 시장과 회당, 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지구는 그들 중심의 지역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는다. 그렇지만 세계 2차 대전에서 일어난 나치의 소행에 의해 카지미에슈 지구는 큰 위기를 겪게 되고, 그들의 위축된 모습은 냉전 시기까지 이어진다. 이 지구가 지금의 독특한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시기는 90년대 초반 소련의 공산주의가 완전히 무너진 순간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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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들을 보면 저렇게 유대인들만의 독특한 장식이 담긴 물건들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것은 훈장 같이 생겼고, 또 어떤 것은 군용 물품처럼 보였다. 어떤 물건은 화학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것도 있었다. 확실한 것은 저 물건들 상당수가 이 지역 고유의 물건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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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 본인은 아루잔, 누라이, 다이애나와 함께 시장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시장에는 투리가 설명한 그대로 골동품이나 지역 특산 훈장(?)들뿐만 아니라 목걸이 등의 장신구들도 있었다. 어느 정도 시장을 둘러봤다고 느낄 때쯤, ESN 단체채팅에서 공지가 떴다. 한 시간 반 동안 자유롭게 이동하다가 성 메리 성당에서 모이라는 내용이었다. 여태껏 동기들하고 계속 이동하다 보니, 이번에는 혼자 조용히 돌아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다이애나도 가고 싶은 장소가 따로 있어서 단독으로 움직이려는 것 같았다. 본인 역시 좀 더 카지미에슈 지구를 둘러보기 위해 따로 움직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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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리가 둘러본 카지미에시 지구와 크라쿠프 구시가지의 차이점을 말하자면, 카지미에시 지구는 조금 더 회색빛 느낌이 강했다. 뭐랄까, 어딘가 낡고 어두운 배경이 있으면서도, 그 골목에 있는 상점들과 빈티지 가게들 하나하나가 고유의 감성을 띄었다. 본인이 가려고 했을 때는 막혔지만, 이곳에는 유대인들의 공동묘지도 운영되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그들이 받은 상처의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변화한 지 100년도 채 안 되었으니 오랜 시간이라고 볼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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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이 모인 곳이라 그렇게 안 보이겠지만, 이 안에는 성당들도 많이 있다. 지금 위 사진에 있는 두 성당 모두 카지미에시 지구 안에 있다. 특히 위에 있는 하얀 대리석의 성당(Basilica of St. Michael the Archangel)은 폴란드의 수호성인들 중 한 명이라는 성 스타니슬라스의 유해가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저 규모가 큰 성당들을 통해 알 수 있듯 카지미에시 지구에는 유대교만큼은 아니더라도 기독교의 흔적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위키백과 지도를 찾아서 보면 여러 개의 교회들이 위치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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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주택 사진


20250322_154756.jpg 분위기가 있어서 순간적으로 찍은 골목의 사진.



일반 주택가의 모습이나 거리의 풍경을 보면, 분위기는 확실히 이전의 글들에 등장했던 관광지들에 비해 분위기가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거리에는 그 자체로 낡고 빈티지한 감성이 충만하다. 바로 위의 사진을 보라. 거리 풍경을 보면 어딘가 '70~80년대 추억의 골든 팝송' CD 케이스에 나올 법한 커버 사진 같지 않은가? MZ 부모님 세대 분들이 즐겼을 것 같은 그런 아날로그 느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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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진짜로 아날로그 CD도 팔고 있었다. 골목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한 음반 가게가 눈에 들어와서 안에 들어가 봤는데, LP판을 비롯해 다양한 추억의 물건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었다. 비틀스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때 당시 활약했던 밴드들 중 이름이 익숙한 그룹들은 여기에 다 있는 것 같았다.



보면 알겠지만, 여기는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는 장소이면서 동시에 유대교 색채가 많이 강요되지 않는 동네다. 카지미에시 거리의 낡고 흰 벽들은 예술가디자이너들이 그라피티 아트(Graffiti Art)를 선보이기 좋은 대상이고, 전통적인 유대 식당 옆에 대놓고 와인 바나 재즈 클럽이 있는 경우도 많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금욕의 편인 유대교와 기독교, 그에 반해 자유분방한 편에 있는 길거리 예술과 재즈 음악의 조합은 이 지역 자체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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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대 쪽을 바라보니, 와우.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알고 보니 위 사진의 DJ 솜씨였던 것. 사진에서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여성 분은 아주 열정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디제잉을 하고 계셨다. 투리는 가게에서 디제잉을 하는 DJ가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쪽 동네는 저 정도 바이브는 있어야 음악 시장에서 살아남는구나.



투리가 시간이 안 되어서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카지미에시 거리에는 펍에서 라이브 공연도 이따금씩 펼쳐진다고 한다. 어디 펍뿐인가. 오전에 이 거리는 유대인들의 엄숙하고 정결한 공간으로 남지만, 밤에는 길거리만 해도 힙스터 차림의 음악인들이 모여서 거리 퍼포먼스나 버스킹을 선보이는 무대의 장으로 바뀐다. 말 그대로 유대인들이 사는 '힙스터 성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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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다른 쪽에는 이디시어(Yiddish, 유럽에 정착해 살던 유대인들이 쓰는 언어)로 되어 있는 유대 분위기의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저 건물이 회당이지 않을까 싶다. 만일 회당이 맞다면, 저곳은 투리가 살면서 처음으로 마주한 회당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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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뭐가 적혀 있는지 자세히 확인해 보니, 인질을 데려와달라는 문구와 함께 납치당한 여러 사람들의 사진이 붙여져 있었다. 보아하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 당시 가자지구로 납치된 이스라엘 쪽의 인질들의 사진인 것 같았다. 그들 중 몇몇은 풀려난 것 같지만, 슬프게도 '살해당함'이라는 검은 표시가 달린 사람들의 숫자가 더 많이 보였다. 비록 같은 종교는 아니지만, 저 끔찍한 전쟁의 희생양이 되어 버린 그들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참고로 이 글을 쓰는 시점이 되는 지금까지도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하마스의 인질극 도발에 이스라엘이 자극받아 가자지구 전선을 더욱 확대할 계획에 있다. 투리가 듣기에 가자지구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부터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낮고 치안이 나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곳에 부디 하마스와 같은 위험한 무장 정파가 사라지고, 이스라엘도 전쟁을 중단해 더 이상의 피해가 발생하지 않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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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성당, 회당, 음반 가게, 거리 등 여기저기를 둘러다니다 보니, 어느덧 집합 시간이 가까워졌다. 이 거리를 너무 즐긴 탓인가, 동기들끼리 약속한 도착 장소까지 걸어서 도착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카지미에슈 거리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유대인의 거리에서 벗어난 재미있는 거리였다. 어딘가 가라앉은 것 같으면서도, 그 음지에서 음악과 예술이 싹트는 인디 감성의 거리. 정리하자면 딱 그런 느낌이다.



20250322_163148.jpg 유대인의 복장을 직접 보는 게 난생처음이라 신기해서 찍은 사진. 왼쪽에 있다.



본인이 여기를 다시 올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거리는 이미 한 번의 방문만으로 투리에게 유대인과 접할 기회를 제공한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여기를 들렀을 당시에는 앞으로 유대인의 흔적이 많은 장소를 폴란드에서 자주 들를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거리는 유대인에 대한 투리의 심리적 거리를 처음으로 해소한 흥미로운 관광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규례와 의식에 철저할 것 같은 유대인의 거리, 하지만 그와 동시에 다양한 개성 있는 사람들도 함께 거주하는 예술의 공간. 결국에는 유대인도 사람이니, 그런 예술가들과의 동거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적어도 나치당이나 소련군보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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