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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는

나 정말 괜찮아

by 유엘 Mar 02.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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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나름대로 화목한 집안이기도 하다. 아빠는 집안일을 주로 맡아서 하고, 엄마는 직장에 다니는 분이었다. 우리 집이 그다지 부유한 편은 아니었지만 부모님은 자주 장난을 치시는 분이었고, 나도 사랑을 받을 만큼 받았었다. 게다가 난 형제자매 하나 없는 외동이라 사랑을 몰아서 받았던 것 같다.


그렇지만 사랑을 받은 만큼, 화살도 전부 내게로 향했다.


부부싸움이 생기면 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전부 내게 했고,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는 전부 내게 화풀이를 했다. 부부싸움이 심하게 되어 큰 소리가 오가고 하다못해 몸싸움까지 벌어지면, 그만 좀 하라며 둘 사이를 가로막고 소리를 지르면 너 때문에 더 화가 난다고 조용히 하라고 되려 소리만 높이던 게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냥 한집에 사는 동거인이구나 라는 생각만 수도 없이 들었다.


아빠는 성적이 좋지 않게 나오면 시험지를 찢어버리거나 문제집을 바닥에 던지며 다 버려버리라고 소리를 쳤고, 내가 하지 마라고 하면 공부도 안 할 걸 왜 돈 주고 샀냐고, 학원도 다 끊어버리라며 내게 손찌검까지 했다.


맞는 부위는 항상 다 달랐다.

어느 날은 뒤통수를 세게 내려 맞기도 하고, 발로 어깨를 걷어차이기도 하고, 내 허벅지를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고, 책 같은 걸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고, 코를 세게 쥐어잡아 멍이 들기도 했다. 코 빼고는 멍이 들지는 않았지만 일시적으로 맞은 부위가 붉게 변하거나, 머리 같은 곳을 맞을 때는 머리가 울리기도 했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아빠는 항상 그랬듯 미안하다며 상황을 대충 넘기기만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괜찮다며 웃어 보여야 했다.

몇 개월 전의 이야기긴 한데, 아빠랑 마트에 갔다가 실수로 카트를 잘못 밀어서 아빠의 발 뒤꿈치가 까진 적이 있었다. 아빠에게 미안하다며 사과도 수십 번 했지만 아빠는 나에게 온갖 신경질을 다 내며 욕설은 물론 그냥 그 자리에서 날 놔두고 가버렸다.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 나는 항상 사과를 받아줘야 하는 선택지밖에 없었는데 아빠는 내 사과를 안 받아도 되는 선택지도 있구나.


남 때문에 힘든 건 남이니까 그러려니 해도, 가족 때문에 힘든 건 어떻게 해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다. 같이 사는 가족이고, 분명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가족인데 돌변할 때는 이렇게까지 날 죽고 싶도록 만든다는 게 가족이라니 이해도 잘 안 간다.


엄마는 아빠보다는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화가 나면 말보다는 폭력을 일삼는 아빠에 비해 엄마는 폭력은 잘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가끔가다 부부싸움이 심하게 번지면 아빠에게 손찌검은 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손찌검은 한 적은 잘 없는 것 같다.


엄마는 아빠 욕을 항상 내게 했다. 너는 절대 아빠 같은 사람 만나지 말라고, 아빠 때문에 같이 못 살겠다며 항상 내게 부담감만 심어주던 사람이었다.

물론 엄마도 말 못 할 고민들이 많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직장에 다닌다는 게 꼭 쉬운 일만은 아니니까. 그렇지만 그걸 내게 풀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나도 힘든데.


2, 3주 전의 이야기인데 아빠가 내 다이어리를 읽었다. 다이어리에는 부모님에 대한 얘기들도 많이 쓰여 있었고, 내 심정을 가득 써 놨었다. 밤마다 운다는 얘기도, 죽고 싶다는 얘기도, 너무 외롭다는 얘기도 전부 털어놨던 다이어리였다.


아빠는 그걸 읽고 내게 그 다이어리 중 한 페이지를 소리 내서 읽어보라고 했다. 정말 그때만큼 수치심과 배신감이 들었던 날은 또 없을 것 같다.


아빠는 운동을 가끔씩 집에서 소소하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내 다이어리를 아빠가 읽어버린 날에도 거실에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때 한 말 중 한마디가 난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너 때려죽이려고 지금 운동하고 있는 거야.


솔직히 세상에는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하면 안 될 말들을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이 하고 있다는 걸 안다. 물론 부모들도 하지 말아야 할 말들을 어떻게 다 알겠는가. 그래도 저 말 정도는 부모들 뿐만 아니라 이제 막 유치원에 들어간 아이도 하면 안 되는 말이라는 걸 인지할 수 있을 것이다.


아빠는 내게 정말 많은 욕설들을 한다. 나는 들어도 이젠 아무렇지도 않다. 그중 몇 개를 아래에 적어두었다.


* 다소 보기 불편한 말들이 적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딸 ○○이는 12살에 죽었어.
죽고 싶으면 내가 죽여줄 테니까 죽고 싶으면 말해. 내가 너 태어나게 했으니까 내가 죽이는 게 맞잖아.
너 앞으로 나가서 애들이랑 놀지 마. 학교도 다니지 말고, 학원도 다니지 마.
지 애미나 딸년이나..
시발년.
미친년이 지랄하고 있네.


아빠가 다이어리를 읽은 날, 아빠는 마트에 다녀오는 길에 정자에 앉아 내게 말했다.


제발 그러지 마, ○○아. 제발.. 제발 그러지 마. 아빠가 이렇게 부탁할게. ○○이가 아빠랑은 다르게 16살에 너무 빨리 철이 들어 버려서 생각이 많아져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아빠가 멍청해 보여도 너 힘들 때 얘기는 들어줄 수 있으니까 제발 그런 생각하지 마.


그 말을 들을 때 왜 이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마냥 강해 보이기만 했던 아빠가 눈에 눈물이 고여서 그랬던 걸까? 아님 내가 너무 힘든데, 아빠가 그걸 이제야 알아줘서 기뻤던 걸까?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눈물이 자꾸만 흐르려고 한다. 하지만 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흐르지 않게 버틴다. 나는 위로가 그저 필요했던 걸까? 아님 알아주는 것만이라도 그토록 원했던 걸까?


철이 일찍 든 아이는, 일찍 어른스러워진 게 아니라 참는 걸 너무 빨리 배워 버린 거라고 한다.

나는 철이 빨리 들어버린 아이다. 겉으로는 걱정 하나 없어 보이는 아이처럼 보이는데, 있지도 않은 일들을 걱정하느라 잠도 설치고, 겨우 잠에 들더라도 꿈에서마저 그 일들에 관련된 꿈들을 꾸는 게 나다.


그냥.. 그냥 오늘만큼은 남이 아닌 내가 위로받고 싶었다. 나처럼 세상에 혼자 남은 사람들을 위한 글을 쓰는 게 나의 목표였는데 나도 사람이기에 솔직히 위로받고 싶다.


자꾸만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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