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같은 사람
연정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혜유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정아! 내 침대 옆에 보면 작은 책상 하나 있거든? 그것 좀 펴서 준비해 놔!"
연정은 혜유의 말을 듣고 침대 옆을 바라봤다. 어렸을 적 집에 찾아오신 학습지 선생님들과 나란히 앉아있을 법한 정말 작은 책상이었다. 연정이 책상을 바닥에 펴자 마침 혜유가 냄비를 가지고 방에 들어왔다. 혜유는 책상 바로 옆에 있는 헌 책을 눈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책상에 올려주라."
연정이 재빠르게 헌 책을 책상 위에 올리고 혜유는 그 위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냄비를 올렸다. 방에 매콤한 라면 냄새가 가득 퍼졌다. 혜유는 다시 방을 나가더니 그릇과 젓가락을 들고 돌아왔다. 연정은 말없이 라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혜유는 연정의 라면을 먼저 덜어주었다.
"여기."
"어, 어.. 고마워."
혜유는 자신의 그릇에도 라면을 덜더니 라면을 맛있게 먹는 연정을 보며 물었다.
"너 라면 자주 먹어?"
"아니.. 자주 못 먹어. 부모님이 반대가 심하셔서.."
"라면이 몸에 좋은 건 아니지만 엄청 맛있지 않아?"
"응.. 나도 라면 좋아해."
연정은 그릇을 들고 라면 국물을 마시다가 안경에 뿌옇게 김이 찼다. 연정은 아무렇지 않게 안경을 벗어서 옷에 대충 닦았다.
"오.. 나 너 안경 벗은 모습 처음 봐."
".. 그런가?"
"응, 너 안경 벗으니까 엄청 예쁜데?"
"자꾸 이상한 소리 한다, 또. 잔말 말고 라면이나 먹어. 너 라면 지금 한 입도 안 먹었잖아."
혜유는 미소를 지으며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혜유와 연정은 마주 보고 앉아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설거지까지 마친 둘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가만히 천장만 바라보았다. 어둠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았는지 앞은 어둡기만 했다. 혜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되게 나 같아."
".. 응?"
연정은 흐릿하게 형체만 보이는 혜유를 바라보았다. 혜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전등처럼 어두운 거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어둡다니?"
"전등도 불을 켜면 밝지만, 불을 끄면 어둡잖아. 나는 꼭 전등 같다고. 항상 어두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밝게 빛나는."
".. 내가 전에 안 밝아져도 된다고 했잖아."
"근데 그렇게 못할 것 같아. 나는 이미 전등이 되어버려서."
한동안은 혜유와 연정 사이에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혜유는 조용히 속삭였다.
"잘 자."
혜유의 말을 들은 연정은 차마 입 밖으로 말을 내뱉지는 못하고 조용히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너도 잘 자.'
혜유는 그렇게 벽 쪽으로 등을 돌렸고, 적어도 연정이 잠들 때까지는 연정 쪽으로 등을 돌리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혜유가 연정을 깨웠다.
"연정아, 7시 30분이야. 일어나야 돼."
연정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혜유는 이제 막 씻고 나온 건지 머리카락이 아직 축축해 보였다. 연정이 침대에서 일어나자 혜유가 물었다.
"교복은? 가져왔어?"
"응.."
"되게 철저하다, 너. 아무튼 얼른 씻고 나와. 씻기에 조금 촉박하면 세수만 하고."
연정은 대충 고개만 끄덕인 후 화장실로 들어가 세수와 양치만 하고 나왔다. 혜유는 아무래도 단발이어서 그런지 벌써 머리카락을 다 말린 듯했다. 혜유는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고 있었고, 혜선은 밥솥에서 밥을 주걱으로 푸고 있었다.
혜유, 연정, 혜선, 이렇게 세 사람을 식탁에 앉아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혜선이 연정에게 말을 걸었다.
"반찬이 조금 차갑지? 우리가 이렇게 대충 먹는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밥은 따뜻하니까 밥이랑 먹으면 괜찮을 거야!"
"네.. 감사합니다."
연정은 웃으며 답했다. 혜선의 말을 들은 혜유는 혜선의 어깨를 툭 쳤다.
"언니, 말 좀 제대로 해."
"뭐, 내가 어쨌다고."
혜유와 혜선은 또 아침부터 투닥거리기 시작했고, 그런 자매의 모습도 연정은 소중히 여기며 바라보았다.
"연정아, 차 조심하고. 세상이 요즘 흉흉하니까 큰길로 다녀야 한다."
"감사합니다, 언니."
"언니, 나는? 나는 걱정 안 해 줘?"
"어, 알아서 잘 다녀와."
"언니..!"
혜선은 혜유를 집에서 내쫓듯이 현관문에서 밀었고 그대로 문을 닫았다. 혜유는 한숨을 쉬었다.
".. 우리 언니가 좀 이상해. 이해 좀 해줘."
"재밌으신데?"
"뭐래..!"
"진짠데?"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아, 왜.."
연정은 웃으며 혜유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