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아이
혜유는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거리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말했다.
".. 실례가 많았습니다. 가보겠습니다."
혜유는 그대로 연정을 데리고 강당을 빠져나갔다. 혜유와 연정은 도서관 의자에 앉았다. 연정이 혜유쪽으로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너 왜 갑자기 나왔어?"
"그냥.."
"너한테 그냥이 어딨어? 왜 그랬는데?"
"나는 걔 이름이 궁금했거든. 물론 민이랑 내가 무슨 사이는 아니지만 그래도.."
"걔 딱 보니까 원래 그런 성격인 것 같던데. 네가 싫은 게 아니라."
"그런가..?"
"응, 친구 같아 보이는 사람한테도 쌀쌀맞던데?"
혜유는 애꿎은 손만 만지작거렸다.
"그럼 다행이고.."
학교가 끝나고, 혜유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원으로 향했다. 학원에 도착하자 민서가 혜유에게 반갑게 인사를 했다.
"하이! 오늘은 조금 늦으셨네요?"
"응.. 하이."
혜유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의자에 앉자 민서가 혜유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 있었냐? 평소답지 않네."
"무슨 일이 있었겠어.."
"무슨 일 있었는데?"
"아니래도.."
"맞는데. 무슨 일인지 이 언니한테 다 말해봐!"
혜유는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냥 이 일은 민서에게 얘기하고 싶지 않았다.
연정은 혜유의 방 안에서 어색하게 문제집을 풀었다. 가출해서 어떻게 보면 집도 없는 이 상황에도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게 조금 어이없기도 했지만 이미 습관이 돼버린 탓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으면 큰 죄라도 지는 것 같았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더니 혜선이 고개를 내밀었다.
"연정아, 뭐 해?"
"문제집 풀어요. 왜요?"
"와, 너 공부 엄청 열심히 한다."
혜선은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 연정의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아니요, 뭐.."
"우리 혜유는 공부를 어쩜 그렇게 안 하는지.. 너 같은 동생 있었으면 진짜 좋겠다."
"혜유 공부 엄청 잘하잖아요."
"그래? 근데 집에서 너처럼 공부하는 걸 본 적이 없어."
"아마 밖에서 열심히 하나 봐요."
혜선은 연정의 옆에서 조용히 연정을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있잖아, 네가 지금 혜유랑 가장 친한 것 같아서 하는 말인데.."
연정은 하던 공부를 멈추고 혜선을 쳐다보았다. 혜선은 우물쭈물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혜유가 전 같지가 않아."
".. 네?"
"분명 밝긴 밝아. 근데 전이랑 뭔가가 분명 달라. 내가 알던 혜유가 아닌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혜유가요?"
"응, 내가 봤을 땐 그래. 엄마는 내가 너무 예민한 거라고 하시는데, 나는 아니라고 보거든. 가족 중에서 가장 친한 사람이 나였으니까."
연정은 혜선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혜선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혜유, 언제부터 그랬는지 짐작 가는 게 있긴 해."
혜유는 학원을 끝내고 집에 바로 들어가지 않았다. 혜선에게는 그저 스터디 카페에 들렀다가 갈 거라고 한 뒤 놀이터 그네에 앉았다. 발을 조금씩 움직이자 그네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농구장에서 공 튀기는 소리가 났다. 혜유는 무의식적으로 그곳으로 향했고, 민을 발견했다.
민은 혜유를 눈치채지 못한 채 열심히 드리블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정신을 꽉 붙잡은 채로 농구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한참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드리블 연습을 하던 민은 연습을 멈추고 그 자리에 들어 누웠다.
"하아.. 하아.."
"저기.."
민은 가친 숨을 몰아쉬다가 인기척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혜유는 민에게 손을 살짝 흔들어 보였다. 나름대로 민을 배려해 준 인사법이었다. 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티로 얼굴을 대충 닦았다.
"농구 연습.. 하는 거야?"
"어, 왜?"
"그냥.. 열심히 하는 모습 보기 좋다고."
".. 어."
민은 무뚝뚝하게 답하고 이내 불편한지 혜유의 반대쪽으로 고개를 잠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