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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13

비 오던 그날에

by 유엘 Apr 0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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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유와 혜선의 대화를 들은 연정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말없이 챙겨 온 짐을 가방에 하나씩 정리했다. 당장이라도 나갈 수 있도록.


다음 날 아침, 연정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거실로 나가보니 역시나 혜선은 아직 자고 있는 건지 차가운 공기만이 맴돌고 있었다. 연정은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한 장을 찢었다. 이만 가본다는 말과 고마웠다는 말을 적은 채로 그대로 집을 나갔다. 어차피 오늘은 주말이다. 적어도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밖에서 버틸 생각이었다.




민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농구장 바닥은 차가웠다. 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푸른 하늘이 보였다. 민은 눈을 감고 그 자리에서 얼굴 옆으로 스쳐 지나가는 시원한 바람을 느꼈다. 민의 손에는 어느새 흙이 잔뜩 묻어 있었다. 민이 농구를 시작한 것도, 벌써 4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민은 한때 초등학교에서 꽤나 잘 나가는 농구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는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들 시합이 있을 때면 민을 보러 너 나 할 것 없이 강당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민은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고 있었다. 이렇게 농구만 하면서 행복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민의 아빠는 갑작스레 사고사로 죽게 되고, 자연스레 민은 시골에 있는 할머니 댁에 가서 할머니 손에 자라게 되었다. 당장 집안일도 바쁘다 보니 농구공도 점차 손에서 놓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하루 농구란 존재를 가슴 한 구석에 묻어가고 있다.


어느새 초등학교 5학년이 되고, 민은 슈퍼에 가서 참기름 하나를 사서 나왔다. 민의 할머니가 시킨 심부름이었다. 그날따라 하늘은 유독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이 우중충했다.


"아.. 빨리 가야겠다."


민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초등학교 앞을 지나가고 있을 때쯤, 어디선가 농구공을 튀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은 그 자리에 멈춰 주변을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한 남학생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민은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 동안을 그 자리에 멈춰 그 남학생을 지켜보았다. 마치 자신의 2년 전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남학생은 시선을 느끼고 민을 쳐다보았다. 민은 순간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남학생은 멀리서 민에게 이리 와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민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남학생에게 갔다. 남학생은 민에게 농구공을 건네주었다.


"농구 좋아하냐?"

".. 어?"

"아니, 계속 쳐다보길래. 같이 할래?"

"그게.."


민은 어렸을 적부터 쑥스러움이 많아서 이렇게 처음 본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게 조금 어색했다. 남학생은 그런 민을 보고 피식 웃었다.


"하고 싶으면 말을 해, 인마."

"어..."

"내가 그렇게 불편해서 대답도 못 하겠으면, 농구 친구 하고."

"농구.. 친구?"

"그래, 처음 들어보냐? 너랑 나랑 농구로 친구 하는 거야. 딱히 대화도 안 해도 되고 농구만 하는 거지."


민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나 여기서 맨날 기다린다? 꼭 와라, 친구야~."

"으응.."


민과 남학생은 어색하게 농구하기를 시작했다. 어느새 하늘에선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졌다. 둘은 비를 맞으면서 농구를 했다.


그 후로도 민과 남학생은 꾸준히 농구만 했다. 처음에는 낯설어하던 민도 어느새 남학생을 보고 먼저 말을 걸 정도로 둘은 가까워졌다.


하루는 당장이라도 비가 올 것처럼 흐린 날이었다. 민은 평소와 같이 학교 농구장으로 향했다. 평소대로라면 농구장에서 왜 이렇게 늦게 왔냐며 구박을 해야 할 남학생이 보이지 않았다. 민은 남학생을 찾으러 학교 주변을 돌아다녔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고, 민은 마음이 더 조급해졌다.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그 남학생을 부르지도 못하고 어딨냐는 말만 반복하며 비를 맞으며 뛰어다녔다.


그 순간, 멀리 각양각색의 우산을 쓴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민은 무의식적으로 그곳으로 뛰어갔고, 길바닥에 누워 차갑게 식어있는 남학생을 발견했다.


성한 곳이라곤 없고, 이미 굳어버린 피가 그 남학생의 몸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사람들은 수군대기만 할 뿐 피범벅이 된 그 남학생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이미 죽었으니 딱히 살리려는 마음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민은 비가 내리는 날 남학생을 처음 만났고, 비가 내리는 날 남학생을 마지막으로 만났다.


금, 토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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