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기억
연정은 혜유를 기다리며 말없이 초코라테만 홀짝였다. 그 순간, 연정의 휴대폰이 울렸다. 혜유의 언니인 혜선으로부터 온 연락이었다.
혜유 너랑 같이 있어?
네.
그래? 혜유랑 연락이 안 돼서..
혜유 잠시 주환이랑 전화하러 나가서 그런가 봐요.
아.. 근데 연정아, 전에 혜유가 갑자기 변했다는 원인.. 그거 이제 말해줘야 할 것 같아서. 좀 있다가 잠시 만날래?
아, 네..!
혜선과의 연락을 마치자마자 혜유가 자리에 앉았다.
"주환이가 뭐래?"
"내일 학교로 얼른 오라고.. 하, 하여튼 방송부원이 넘치는데 맨날 나만 불러요, 나만."
"주환이는 네가 편한가 보지."
"걔 이미 방송부에 친한 애들 많거든?"
"그중에서도 네가 가장 친하다고 느끼나 보지."
혜유는 연정을 째려보았다.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이 없네."
혜유의 말에 연정이 피식 웃었다. 연정은 남아있던 초코라테를 마저 마셨다. 혜유도 머지않아 복숭아 아이스티를 다 마셨다. 둘은 함께 카페를 나섰다.
연정은 대충 핑계를 둘러대고 혜선을 만나기 위해 혜유를 얼른 보냈다. 혜유는 아무런 의심 없이 잘 가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연정은 근처 편의점 앞에서 신발 끝으로 땅을 차며 혜선을 기다렸다. 혜선은 곧바로 편의점으로 나왔다.
"괜히 바쁜데 불러낸 건 아닌가 싶네."
"괜찮아요. 집에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거든요."
"일단 들어가자."
연정과 혜선은 각각 바나나우유를 손에 쥔 채로 편의점 안 의자에 앉았다. 혜선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혜유는 학교에서 어때? 잘 지내?"
"네, 인기도 많아요."
"그래..?"
연정의 말을 들은 혜선은 다행이라는 듯이 희미한 미소를 품었다가 이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변했다.
"너한테 이런 얘기 함부로 해도 될지는 모르겠는데, 혜유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마음을 완전히 연 건 네가 두 번째여서. 그래서 말하는 거야."
두 번째라는 말이 조금 신경 쓰이긴 했지만 연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혜선의 말에 집중했다.
"혜유가 지금은 사귀는 애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사실 혜유, 몇 년 전만 해도 남자친구가 있었어."
"아.."
"둘은 끔찍이도 서로를 아꼈지. 지금의 너랑 혜유처럼 말이야. 하지만 원래 소설에서나, 현실에서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하는 것처럼 그 행복도 오래가지 못했어. 혜유의 남자친구가 혜유를 버렸거든. 고작 다른 여자애한테 눈이 멀어서."
"버렸다고요..? 아니, 사랑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나도 묻고 싶다, 왜 버렸는지. 아무튼 혜유도 처음에는 그저 개인사정이 있겠지 하며 이별을 받아들였는데 나중에 알게 되었어. 그 남자애가 왜 자신을 버렸는지.."
어느새 혜선의 눈에는 슬픔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 후로 혜유가 강박증 같은 게 생겼어. 남에게 버림받기 전에 자신이 먼저 잘해야 한다고."
연정은 왜 그동안 혜유가 모두에게 친절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감정은 드러내지 않고 온통 웃는 모습만 보여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도 항상 괜찮다고만 했다. 말과는 다르게 눈에는 항상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혼자 있을 때면 누군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에 잠겨 있곤 했다.
그 모든 게, 자신을 버린 전 남자친구 때문이었다.
"그래서 혜유가.. 그동안 모두에게 친절했던 거군요."
"혜유가 모두에게 친절했었어?"
"네, 뭔가 이상하다곤 생각했지만 그럴 줄은.."
"그것도 하나의 강박증이었을 거야. 혜유가 성격이 나쁜 건 아니지만, 모두에게 웃는 모습만 보여줬던 애는 아니거든. 적어도 화나면 화내고, 슬프면 울고.. 그랬었는데."
"무서웠나 봐요, 모두가 자신을 버릴까 봐."
"응.. 그랬던 거지, 아무래도."
연정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고개를 들고 물었다.
"혜유 전 남자친구, 누군지 알 수 있을까요?"
"쫓아가기라도 하게?"
"아니요, 그건 아니고.."
혜선은 피식 웃으며 말이 없었다. 아무래도 전 남자친구 이름은 얘기해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연정은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하긴, 너무 무례했죠. 죄송합ㄴ.."
"이승현."
".. 네?"
갑작스러운 혜선의 대답에 연정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혜선은 연정을 바라보지 않고 창밖만 바라본 채로 있었다.
"이승현이라고, 걔 이름."
"아.."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바보 언니니까, 너한테라도 말해주는 거야. 물론 네가 걔한테 어떻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혜유가 그 자식한테 또 상처받기 전에 네가 혜유 좀 도와달라고."
".. 당연하죠."
연정과 혜유는 서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