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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하는 발자국

포로부대, 내무성 건설대_05

by NKDBer

포로 교환에서 제외된 후, 나는 평안북도 천마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국군포로들이 모여 있었고, 우리는 북한 당국에 의해 ‘내무성 건설대’라는 이름으로 편성되었다. 약 600명, 네 개 중대로 조직된 우리는 철저한 통제 속에서 노동과 사상 교육을 통해 북한의 이념을 주입받으며 생활해야 했다.

건설대에서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나는 허리 부상의 후유증 덕에 탄광 같은 중노동 대신 주로 경비 임무를 맡았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희망 하나로 버티며, 조금이라도 몸을 아낄 수 있는 상황에 처한 것에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함경북도 경원군으로 이동했고, 대다수 대원들은 하면탄광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이어갔다. 대원들은 낮에는 탄광에서 석탄을 캐고, 밤에는 사회주의 사상 교육에 동원되며 거의 휴식 없이 육체적, 정신적 고통 속에서 지내야 했다.

나는 전시 부상 덕에 탄광에서의 고된 작업은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광산 기계 수리 작업에 배정되었다. 오래된 기계들은 자주 고장 나서, 매번 기름과 먼지에 뒤덮인 채로 수리를 해야 했고, 이 작업 역시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탄광 깊은 곳에서 지친 몸을 혹사시키며 일하는 동료들을 생각하면, 내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들의 고된 노동을 볼 때마다 미안함과 안쓰러움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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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들은 마치 기계처럼 지쳐도 멈추지 않고 묵묵히 일에 매달렸고, 그들의 노동은 일사불란하게 돌아갔다. 한 명이 지치거나 느려지면 빈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채웠고, 그 반복은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들은 개개인의 존재가 아닌, 오로지 일에 묶인 하나의 노동 기계처럼 다루어졌으며, 휴식과 안식은 그저 먼 이야기로만 남아 있었다.


우리의 생활은 집단 합숙 속에서 철저히 통제되었고, 매일 새벽 나팔 소리에 맞춰 일제히 기상해 각자 맡은 작업에 투입되었다. 하루 종일 이어지는 중노동을 마친 후에도 저녁에는 사회주의 교양 강의에 참석해야 했다. 이 강의는 북한의 이념을 주입하고, 우리의 과거를 부정하도록 강요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나는 그 시간을 무기력하게 견디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가면서 우리의 삶은 점점 더 체제에 의해 통제된 일상으로 굳어져 갔다.

마침내 1956년 6월, 내무성 건설대 전원에게 제대 명령이 내려졌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잠시나마 자유에 대한 기대가 생겼다. 그러나 제대는 진정한 해방이 아니었다. 제대와 함께 지급된 2만 원과 공민증은 북한 주민으로서의 삶을 의미했으며, 이는 곧 고향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뜻했다. 공민증을 손에 쥐고서도 나는 여전히 갈 곳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포로도 아니고,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도 아닌 북한의 주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제대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고향으로의 길이 완전히 막혀 있다는 현실이 명확해지면서, 남아 있던 작은 희망마저 점차 사그라졌다. 북한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이 현실은 오히려 나를 더욱 고립감 속에 밀어 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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