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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하는 발자국

포로의 삶 : 희망과 절망의 경계에서_04

by NKDBer

포로가 된 후, 나는 중공군의 지시에 따라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다. 허리 부상은 극심한 통증을 가져왔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도 어려운 상태였지만, 병사들은 거칠게 나를 이송했다.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면서, 마음속에는 아득한 두려움과 고통이 뒤섞였다. 전우들과 함께 지내던 전쟁터에서 이제는 완전히 분리되어,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내 처지가 참담하게 느껴졌다.


야전병원에 도착한 나는 비슷한 처지의 포로들과 함께 치료를 받았지만, 그곳의 상황은 열악했다. 중공군은 국제법에 따라 포로들을 대우하려는 시늉을 했지만, 이는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기 위한 표면적인 처사에 불과했다. 치료라기보다는 최소한의 생명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처치만 이루어졌고, 붕대와 소독 정도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허리 골절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나는, 앉거나 눕는 것조차 고통스러워 오직 각목에 허리를 받친 채 누워 있어야 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 몸은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야전병원에서의 생활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침대에 누운 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다시는 자유롭게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가슴을 짓눌렀지만, 같은 처지의 국군 포로들이 작은 위로가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고, 그 희망만이 힘겨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다리에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엔 몸을 가누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조금씩 몸을 일으켜 세우며 한 걸음씩 내딛기 시작했다. 발걸음은 여전히 불안하고 통증이 뒤따랐지만, 혼자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얼마 후 야전병원의 부상 포로들은 북한의 강동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중공군이 포로들을 북한군에 인계하기 위해서였다. 강동 수용소는 더욱 가혹한 곳이었다. 비좁은 공간에서 많은 포로들이 함께 생활하며, 한정된 식량과 열악한 위생 상태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식사는 겨우 목숨을 이어갈 정도로 부족했고, 그마저도 신선하지 않았다. 우리는 강제 노동에 시달렸고, 노동 중 부상자가 속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포로들은 살아남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을 견디며 적응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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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로 교환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정전 협정이 논의된다는 소식과 함께, 드디어 포로 교환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희망이 피어났다. 그 소식은 내게 자유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란 기대를 안겨주었고, 나는 간절히 그날을 기다렸다. 하지만 교환이 진행될 때마다, 어쩐 일인지 내가 있던 수용소에는 포로 교환에 대한 언급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수많은 포로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생각에 들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와 우리 수용소의 포로들에겐 남은 것이라곤 막막한 침묵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줄지어 이동하는 포로 행렬 속에서 나는 희망이 점차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전쟁이 끝나고 포로 교환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북한은 일부 포로들에게 자유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들은 조국으로 돌아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포로들을 의도적으로 남겨두고, 수용소를 전전하게 하며 희망을 앗아갔다. 포로들을 조국으로 송환시키지 않겠다는 북한의 행태로 인해 깊은 절망감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포로 교환이 내게는 허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지면서, 나는 그토록 바랐던 고향으로의 길이 완전히 막혀버렸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내 앞에 놓인 것은 자유가 아닌, 불투명하고 암담한 미래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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