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용군에서 대한민국 국군으로_02
1948년, 해방의 기쁨이 가시기도 전에 한국은 좌우 대립으로 인해 불안과 긴장에 휩싸였다. 나는 전라남도 무안군 현경면의 작은 마을에서 소방대원으로 활동하며 치안 유지를 도왔다. 처음엔 단순히 화재와 비상 상황에 대비한 조직이었으나, 갈수록 심화된 좌우 갈등 속에서 주민들을 보호하는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그렇게 소방대원으로 지내던 중,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인민군이 남하하며 치안대와 좌익 세력 간의 충돌이 이어졌고, 마을은 혼란에 빠졌다. 북한의 전세가 유리해지자 나는 의용군으로 강제 징집되어 화천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전선에서 다른 의용군들과 전투 훈련을 받으면서도, 전쟁의 목적에 대한 의문과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커져갔다.
며칠 후, 후퇴 명령에 따라 우리는 진안과 장수 일대로 이동했다. 후퇴 명령으로 대열이 느슨해진 틈을 타, 나는 전남 출신 동료들과 탈출을 결심했다. 어둠이 내린 밤, 무기를 버리고 조심스럽게 대열을 벗어나 남쪽으로 향했다. 목숨을 건 탈출 속에서 우리는 숲과 계곡을 가로지르며 밤에는 이동하고, 낮에는 숨어 다음을 준비했다. 모두가 고향의 품으로 돌아가겠다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위험한 여정을 이어갔다. 며칠 밤낮을 걸은 끝에 드디어 전남 땅에 닿았을 때,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웠던 고향의 공기를 맡는 순간, 참아왔던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의용군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소방대원으로서 마을의 치안과 안전을 지키며 헌신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날 기미가 없었고, 전장 소식은 점점 참혹해졌다. 주변의 많은 젊은이들이 전장으로 떠나 돌아오지 못했고, 그들이 흘린 피와 땀의 의미를 고민하면서도, 나 역시 이 길을 피할 수 없음을 느끼기 시작했다. 장남으로서 부모님과 동생들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이 컸지만, 나라와 고향을 위한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다. 조용히 고향을 지키며 살고자 했던 바람은 무너졌지만, 전쟁 속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나 또한 전선에 나가야 했다.
결국 나에게도 영장이 나왔다. 복잡한 마음이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었다. 가족을 두고 떠나는 것이 두렵고 걱정스러웠으나, 조국의 부름을 따르겠다는 결심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나라와 고향을 위해 나도 전선에 나가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군에 입대했다.
1952년, 정식으로 군에 입대한 나는 제주도에서 훈련을 시작했다. 천막 생활과 함께 전투 훈련과 생존 기술을 하나씩 익혀가며 점점 강해져 갔다. 사격, 장애물 훈련, 총검술, 철조망 기어가기를 반복하며 매일 생사의 무게를 느꼈고, 마음 깊이 각오를 다졌다.
3개월의 혹독한 훈련을 마친 후 수도사단에 배치되어 부산에서 대기한 뒤, 강원도 춘천으로 이동해 본격적인 전투에 투입되었다. 나는 위생병으로서 부상당한 전우들을 돌보며 생명을 지키는 일에 매진했고, 그들의 고통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전쟁의 비정함을 절실히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