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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하는 발자국

고단한 어린 시절, 행복한 추억_01

by NKDBer

나는 1930년 전라남도 화순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고향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비가 내리면 질척거리는 흙길, 이른 아침 안개가 내려앉은 들판, 봄이면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길목들이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이 아름다움만큼이나 깊은 고난과 가난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했지만, 우리 집은 특히 더 어려웠다. 우리는 한 평의 땅도 소유하지 못한 소작농으로 살았다. 논에서 피땀 흘려 수확한 쌀과 채소는 우리 것이 아니라, 일본이 요구하는 대로, 한 해 수확 중 가장 좋은 것들을 나라에 바쳐야 했다. 남은 일부만이 겨우 우리 몫으로 돌아왔고, 그것마저도 배불리 먹기에 부족했다.


우리 집에는 형제들이 많았다. 나는 장남이었고, 아래로 여동생 둘과 남동생들이 있었다. 각자 나름대로의 역할을 맡아 집안을 도왔고, 나는 장남답게 작은 가장처럼 동생들을 이끌어야 할 때가 많았다. 특히 농사철이 되면 우리 모두가 일손을 보태야 했다. 부모님은 늘 바쁘셨고, 우리는 그 곁에서 서로 의지하며 일하고 자랐다. 먹을 것이 부족할 때가 많았지만, 형제들끼리 서로 나누고 보듬으며 함께 견뎌냈다.


아버지는 묵묵히 쟁기를 밀며 온몸으로 우리 가족을 지키셨다. 농한기에는 허름한 옷감을 보따리에 싸서 먼 시골 마을을 찾아다니며 생계를 잇기 위해 애쓰셨다. 시장 한쪽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리시던 아버지의 모습이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모습은 단순히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헌신과 희생 그 자체였다. 그 짧은 숨소리 속에는 홀로 짊어진 삶의 무게와 고된 일상이 담겨 있었다.


우리 집 형편이 어려워 형제들 대부분이 제때 학교에 다니지 못했다. 나 역시 장남임에도 9살이 되어서야 소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내게 “부잣집 자식 대학 보내는 것만큼 힘들게 너를 공부시키고 있다. 이걸 꼭 기억해라.”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은 내 마음 깊이 새겨졌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희생이 단순히 내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족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유일한 길임을 깨달았다.


모내기 철이 되면 온 가족이 함께 논으로 나가 각자 자리를 잡고 일했다. 맏이인 나는 맨 앞에 서서 모판을 이고 논으로 들어갔다. 차갑고 질척이는 논바닥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어린 여동생들과 남동생들이 나란히 서서 물장난을 하며 장난을 치자, 아버지는 “장난은 그만하고 집중하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날 우리 가족의 얼굴엔 여유가 흘렀다.


아버지와 나는 나란히 줄을 맞추어 한 줄씩 모를 심어 나갔다. 촉촉한 가랑비가 땅을 적셔 주며 마치 하늘이 돕는 듯했다. 동생들은 가끔 지쳐 뒤처졌지만, 서로를 격려하며 힘을 냈다. “이제 여기만 하면 끝난다!” 남동생이 외치자, 여동생들도 다시 힘을 내며 손을 재촉했다.


해가 중천에 오르자, 모내기를 마친 우리 가족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흙투성이가 된 손과 발을 내려다보며 피로감 속에서도 한 해의 먹거리를 마련한 뿌듯함이 찾아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손을 맞잡은 동생들의 얼굴엔 피곤하면서도 무언가를 이뤄낸 만족감이 담겨 있었다.


겨울이 되면 삶은 더욱 고단해졌다. 농사일이 멈추는 추운 계절, 아버지는 보따리 장사로 새 벽부터 마을을 돌아다니셨다. 밤늦게 동상에 얼룩진 손을 따뜻한 물에 담그시며 내게 미소 짓던 아버지는 늘 “학교에서 배운 걸 말해 보거라” 하시며 내 손을 꼭 잡아주셨다. 어린 마음에도, 그저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배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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