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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하는 발자국

포로에서 “공민”으로_06

by NKDBer

공민증을 지급받으며 우리는 형식적으로 북한의 주민으로 인정받았지만, 실제로는 포로 시절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북한 당국은 우리를 포로에서 해방시키는 척하면서, 여전히 하면탄광으로 집단 배치해 중노동에 시달리게 했다. 포로 출신인 우리를 ‘전후 복구를 위한 젊은 인력’으로 간주하여, 북한 사회 재건을 위한 노동력으로 이용하려는 의도는 분명했다. 그들은 체제에 맞추어 끊임없이 노동을 강요했고, 매일같이 탄광 깊은 곳에서 무거운 석탄을 캐내야만 했다.


탄광에서의 생활은 고통 그 자체였다. 좁고 답답한 갱도 안에서 하루 종일 곡괭이와 삽질을 멈추지 않아야 했다. 탁하고 습한 갱도의 공기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고, 지친 몸으로 교대 근무가 불가능해도 일을 멈출 수 없었다. 하루를 버텨내고 갱도에서 나와도, 밤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저녁마다 이어지는 사회주의 교양 학습 시간은 우리에게 이념과 체제에 순응하라는 세뇌를 강요했다.


북한 당국은 포로들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하는 가운데, 결혼을 장려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제시된 결혼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또 다른 통제 수단이었다. 포로 신분인 우리에게 허락된 결혼 대상은 ‘성분’이 좋지 않은 사람들로 제한되었다.


포로들의 결혼 사업은 주로 작업반장이나 합숙소 인민반장이 앞장서서 주도했다. 그들은 당의 눈밖에 나지 않으려면 결혼을 서둘러야 한다며 포로들에게 강하게 결혼을 종용했다.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체제에 적응하는 또 다른 요구사항처럼 다가왔다. 작업반장과 인민반장은 마치 그들이 충성심을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결혼을 서두르게 했고, 이 과정에서 포로들은 마치 감시 아래에 있는 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처럼 포로들에게 희망을 품지 못하게 하려는 북한 당국의 속셈은 뚜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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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며 몸은 점점 쇠약해져 갔다. 전투 중 입은 부상에 지속된 중노동이 더해져 허리와 다리는 악화되었지만, 당국은 노동 강도를 줄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탄광 대신 광산 기계 수리 쪽으로 배치되었다. 기계 수리는 다소 덜 힘든 일이었으나, 여전히 허리와 팔에 무리가 갔다. 그러나 지하 노동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내무성건설대에서 제대한 이후에도 나와 같은 포로들의 삶은 자유로워지지 않았다. 북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점차 그들의 규칙에 길들여지면서, 우리 안에 남아 있던 고향에 대한 희망은 서서히 희미해져 갔다. 스스로에게 거짓된 일상을 강요하며, 결국 우리는 영혼 없는 인형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기 시작했다. ‘공민’이라는 명칭 속에 억압과 통제의 무게는 점점 더 우리 삶을 짓눌렀고, 고향을 향한 갈망은 체제 속에서 스러져갔다. 포로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 생각 없이 석탄을 캐기 위해 곡괭이를 휘두르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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