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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하는 발자국

못난 아비, 못난 매형_08

by NKDBer

생활 중, 나는 포로 출신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고통받고 차별당하는 현실을 여러 차례 목격했다. 특히 처남이 겪었던 일은 나에게 깊은 상처로 남았다. 아내의 가족들은 나와의 결혼으로 인해, 포로 출신이라는 내 과거 때문에 여러 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처남은 유능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보위부에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진급 기회가 여러 번 주어졌었다. 그러나 나와의 가족 관계와 포로 출신이라는 이유로 인해, 결국 그는 그 기회를 잃고 말았다.


어느 날 처남은 보위부 간부로부터 "네 누이가 포로 출신과 결혼한 이상, 너는 이 계통에서 더 이상 진급할 수 없다. 누이와 이혼하지 않으면 보위부장의 자리는 꿈도 꾸지 말라"는 협박을 받았다. 이 말은 처남에게 직접적인 경고이자, 포로라는 내 신분이 아내의 가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처남은 나와 아내의 결혼을 인정하고 지지해 온 사람으로서, 가족을 위해 이혼을 강요하는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쪽을 택했다. 보위부장이라는 자리는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가 되어버렸다. 처남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해야 했던 일은 그에게도, 나에게도 가슴 깊은 상처로 남았다. 북한 체제에서 포로 출신이라는 낙인은 단지 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삶까지 얽매어 그들의 가능성마저 빼앗았다.


7.처남의 연좌제.jpg


처남이 꿈과 미래를 포기해야 했던 그 상황은 내게 커다란 죄책감으로 남았다. 포로 출신이라는 과거가 가족들에게까지 억압의 굴레를 씌운다는 사실에, 나는 이로 인해 가족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무력감과 비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차별은 아이들에게도 이어졌고, 포로자녀 출신이라는 이유로 차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절감하게 되었다. 나는 그저 자녀들이 평범하게 살아가기를 바랐지만, 포로 출신이라는 내 과거가 자녀들의 삶을 가로막았다. 내 자녀들은 꿈을 펼치려 할수록 ‘출세의 걸림돌’인 성분 문제로 인해 견고한 장벽에 부딪혔다.


특히 아들들이 학업과 직업에서 기회를 얻고자 할 때마다, 그들에게 돌아오는 답변은 언제나 성분 문제였다. 성실히 공부해 좋은 성적을 내더라도, 그들은 원하는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공산대학이나 군사기관 같은 출세의 기회를 얻으려 할 때마다, "포로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입학과 진급의 문턱에서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 성분 문제는 단순한 장벽을 넘어, 자녀들이 더 큰 꿈을 꾸지 못하도록 억누르는 족쇄와 같았다.


이러한 상황을 겪으며 나는 자녀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자녀들이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내가 그들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듯한 죄책감이 나를 짓눌렀다. 자녀들은 ‘포로의 자식’이라는 시선을 의식하며 자라야 했고,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사회생활을 할 때도 이 낙인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런 잘못도 없었지만, 나의 과거로 인해 자신을 낮추고 조심스럽게 살아가야 했다.


때로 자녀들이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대우받지 못하나요?”라고 물을 때마다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그들의 질문에 응답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원망스러웠고, 그저 묵묵히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차별이라는 현실 앞에서 꿈을 포기하고, 출세의 기회를 잃는 모습을 보며 나는 고통스러운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포로 출신이라는 굴레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지며, 그들마저 이 체제 속에 갇혀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나에게 비통함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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