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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하는 발자국

연로보장, 무색해진 세월_09

by NKDBer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연로보장 덕에 더 이상 직접적인 노동에 종사하지 않게 되었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에 닥친 경제난은 연로보장조차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북한 전역이 극심한 경제난에 빠지면서 배급이 끊기다시피 했고, 연로한 나 역시 이 어려움 속에서 예외일 수 없었다. 연로보장으로 받던 식량은 점점 줄었고, 나와 같은 노인들은 배급 순위에서 가장 후순위로 밀려났다.


배급이 끊기면서 나와 내 가족의 생존마저 위태로워졌다. 자녀들은 먹고살기 위해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산과 들에서 식량을 구해야 했다. 집에 남은 가재도구들을 하나씩 팔며 생계를 이어갔으나, 그것도 곧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이제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처지가 되었고, 점점 내가 짐이 되고 있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포로 출신이라는 이유로 우리 가족은 여전히 체제 내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분류되었다. 연로보장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무너진 배급 체제 속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배급은 주로 군인과 정부 간부에게 돌아갔고, 포로 출신인 우리 가족에게는 거의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루하루 굶주림과 싸우며, 나는 이곳에서 내 삶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을 느꼈다.

날이 갈수록 주변에는 굶주림에 쓰러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배급소 앞은 줄을 선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대부분이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다. 나도 긴 대기 끝에 빈손으로 돌아선 날이 많았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최소한의 식량을 구해주려 애썼지만, 고난의 행군 시기는 모든 가족에게 가혹했다. 이 시기의 경제난은 연로한 나와 내 가족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고, 우리를 막막함 속에 가두었다.


세월이 흘러갈수록 마음속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더 깊어졌지만, 포로 신분으로 보낸 세월과 가혹한 현실 속에서 그런 희망조차 품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연로보장은 육체적 고통에서 잠시 벗어나게 해 줬을지 몰라도, 나의 과거와 북한 체제 속 삶을 바꾸지는 못했다. 결국, 나는 포로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고, 연로보장 이후의 삶마저 고향을 그리워하며 억압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시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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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로보장 : 북한에서 남성 만 60세, 여성 만 55세가 되면 은퇴하는 것을 뜻함. 우리나라의 정년퇴임과 유사한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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