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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으로 향하는 발자국

괴뢰군 포로, 성분의 굴레_07

by NKDBer

탄광노동이 어지는 삶 속에서도, 나는 결국 북한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포로신분에서 해방된 후, 북한 당국이 요구한 ‘북한주민’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며 결혼이 시작되었다. 이 결혼이 고된 노동 속에서도 안정과 위안을 주기를 바랐고, 마음 둘 곳을 찾기를 기대했다.


처음엔 서로 조심스러웠다. 아내 역시 전쟁의 상처를 가진 사람이었고, 우리는 큰 기대 없이 서로를 이해하고 의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힘든 일상을 함께 나누며 작은 위로를 찾고,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신뢰와 애정이 쌓여갔다. 함께 가정을 꾸리며 나는 처음으로 북한에서 삶을 살아갈 의미를 느꼈다.


결혼 후 작은 집을 마련해 소박한 일상을 시작했다. 아내와 함께 장터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하고 집안일을 나누며, 가족이 주는 작은 행복을 경험했다. 이로써 삶에 대한 책임감이 더해졌고, 고향은 멀리 있었지만 아내와 함께하는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사회주의 체제 아래에서 노동과 이념 교육에 시달려야 했다. 탄광 일과 기계 수리로 나는 지쳐갔고, 아내도 농사와 가사로 고단한 일상을 보냈다. 때로는 서로 기대며 위로를 얻었으나, 때로는 피로와 불만이 쌓여 충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결혼 생활을 유지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서로에게 유일한 의지처이자 위안이 되어 주었고, 억압된 삶 속에서 우리 가족은 작은 희망처럼 자리 잡았다. 언제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북한에서 아내와 함께 작지만 안정된 가정을 이루며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우리에게는 3남 1녀의 자녀가 생겼고, 그들이 태어날 때마다 기쁨과 함께 복잡한 감정이 일었다. 아이들이 내가 겪은 고난을 이어받지 않을까 두려웠고, 포로 출신이라는 낙인이 이들의 미래에 걸림돌이 될까 걱정스러웠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었고, 나와 아내는 이들이 우리보다 더 나은 삶을 살도록 최선을 다해 보살폈다. 아이들에게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라도 행복을 주고자 했고, 이들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나갔다.



1972년, 북한 당국은 일부 포로 출신을 선발해 공산대학에 보내고 노동당에 입당시키는 ‘보여주기식’ 조치를 취했다. 오랜 세월 성실히 일한 나 역시 공산대학에 선발되었으나, 그 이면에 담긴 체제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기회처럼 보였지만, 이는 또 하나의 충성심 시험대에 불과했다. 대학 생활은 낯설고 고립된 느낌이 강했으며, 다른 학생들의 시선에는 여전히 경계와 의심이 담겨 있었다. 공산대학에서 배우는 이념과 정책들은 외견상 나를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실상은 포로 출신인 나에 대한 감시와 충성심의 시험대였다.


공산대학을 마치고 노동당에 입당하게 되었지만, 그것은 단지 형식에 불과했다. 입당 후에는 지방의 또 다른 산업탄광으로 배치되었고, 탄광과 주변 환경은 바뀌었지만 나를 향한 차별의 눈초리는 그대로였다. 감시와 통제는 오히려 더 심해졌고, 나는 체제에 더욱 순응해야 했다. 포로 출신으로서의 현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공산대학과 입당이라는 명목상의 변화 속에서도, 나는 북한 체제의 도구로 이용당하는 신세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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