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다움' 공고히 하기
나에게는 '살기 위한' 루틴 목록이 여럿이다. 그 중 운동과 함께 최우선으로 꼽는 것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의 기준을 공고히 하는 것'이다.
가정은 이렇다.
나는 나무다.
세차게 부는 바람 속에서, 뿌리째 뽑히지 않도록 견디는 나무.
이 나무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유유해보이지만, 하루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매일 조금씩 뿌리를 뻗어 깊이 땅속에 박힌다.
자연의 날씨는 나무가 입맛대로 조정할 수 없다.
어떤 날은 해가 쨍하며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오지만, 어떤 날은 폭풍우가 거세다.
가지가 부러질 만큼 눈이 겹겹이 쌓이는 날도 있다.
매일 굳건히 서기 위해 나무는, 뿌리를 더 깊게 내리고, 줄기도 굵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흔들려버려 뿌리째 뽑히거나 쇠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도 그렇다.
세상의 수많은 '바람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나 자신만의 기준을 굳게 다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상황과
(나와는 달라보이는) 타인들에게 이리저리 끌려다니지 않을 수 있다.
세상은 늘 상대적 박탈감을 강요하는 곳이다. 우리는 SNS에서 가까운 지인부터 연예인까지 그들의 삶을 모두 볼 수 있는 세상에 산다.
보통, 아주 평범한 시간에 우리는 그것을 본다.
상사에게 깨지고 벅찬 야근 후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육아를 하다 잠시 짬을 내 누운 침대 위에서,
연인과 헤어지고 울적한 마음에 잠시 휴대폰에 의지하던 와중이다.
SNS 속 '그들'의 삶은 정말 멋져보인다.
고급차와 새로 마련한 아파트,
연인으로부터 받았다는 명품과 잦은 해외여행.
자식들의 명문학교 입학 소식까지.
'보통 사람'들은 우울해진다.
자신의 비극은 감춰 두고, 가장 하이라이트의 순간을 포착해 올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비교는 아무 쓸모 없다는 조언을 되새기면서도.
질문해본다.
우리가 이런 순간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답은 NO. 불가능하다.
물론 SNS를 하지 않고,
사람들을 덜 만나고, 인터넷 사용을 덜 함으로써 줄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버스 터미널이나 잠시 들린 병원에 설치된 TV,
정보를 검색하러 들어갔다가 우연히 읽게 되는 뉴스의 헤드라인,
친구와 대화 중 'TMI'로 나온 정보는 어떻게 피할 것인가.
노출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면 우리는 이 순간들은 어떻게 견뎌 나가야 할까.
시선은 다시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결국 내 뿌리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
어떤 바람이 지나가더라도 굳건하게. 혹은 잠깐 흔들리더라도,
바람이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오도록.
"내가 스스로 나서서 자신을 규정하지 않으면, 남들이 얼른 나 대신 나를 부정확하게 규정한다."
미셸 오바마는 말했다.
나를 스스로 규정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노트를 펴고
목표를 적는다.
확언을 하고, 명상을 한다.
자기신뢰를 주는 책을 읽는다.
어떤 것이 좋고, 어떤 것은 싫은지
'나 다움'을 다시 한번 정의한다.
아침에 가장 먼저하는 이 일과를
몇 년 하고 나자,
누가 물어도 나는 바로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사람은 그렇군요,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면
내 우선순위를 매길 수 있게 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느라 바쁘다.
다른 이들의 SNS를 들여다볼 시간도 없게 되며, 보더라도 넘길 수 있는 '맷집'이 강해진다.
물론 그 뿌리가 단단해질 때까지는 아프고 힘들 것이다.
하지만,
경험자로서 이건 약속할 수 있다.
여유 시간을 내 자신의 뿌리를 강하게 만드는 데 쏟으면
스스로가 좋아진다.
그리고 세상도 조금 더 좋아진다.
어떤 폭풍우에도.
나는 나로서 나답게 설 때 가장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