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온몸을 움츠리게 했던 지독한 맹 추위가 잠시 뒤 거름 치더니 2월 아직 이른 봄이지만 어느새 따스한 햇살이 빼꼼히 자신 있게 뽐을 낸다. 하늘은 온전한 봄인데 가슴은 답답하고 금방이라도 구급차를 불러야 하나 숨을 쉴 수가 없다. 머리끝에는 부아가 치밀어 오르며 미칠 듯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또다. 또"
갑자기 아내의 성난 목소리에 나는 대략 짐작을 했다.
지친 마음이 채 다 아물기도 전에
며칠 마음을 잘 달래주면서 괜찮다 싶었고 우리의 대화에 이해했으리라 마음먹었는데 또 서랍 속에 넣어둔 생활비가 없어졌단다. 아내는 당장이라도 학교로 쳐들어가 손버릇 나쁜 저 녀석을 잡아 와 경찰서에 처넣을 판이었다."벌써 몇 번째냐고
이거 집에 도둑 새끼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우리 형편에 1주일 용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한 달 용돈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괜히 셋이나 낳아서 매일 같이 속에 천 불을 지니고 살아야 하냐고" 성질이 나서 분노를 폭발하지 못해 암이라도 걸리겠다며 연거푸 하소연으로 나에게 속사포 잔소리를 퍼 붙는데 나도 심장이 단단한 얼음덩이가 된 기분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벽이라도 한 대 친다면 내 마음이 풀릴까!.
"알았다고 그만하라고 제발, 무슨 노래 가사도 아니고 입에 붙은 말로 애가 셋, 애가 셋 타령 좀 그만하라고" 결국 충동적인 호기심으로 나쁜 행동임을 분명 잘 알고 몇 번이고 타 일렀음에도 불구하고 서랍 속 생활비에 손을 댄 사춘기 딸 때문에 우리 부부는 결국 언성을 높이며 또 싸우고 말았다. 둘이만 있으면 연애시절 생각하며 싸울 일이 하나도 없는데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그렇게 기대치가 높은 것도 아님에도 왜 이렇게 속상한 마음이 커지는지 모르겠다. 복잡해진 머릿속에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차라리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면 이 현실 속의 상처와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될 것을 속상하기만 했다. 아내는 또 습관처럼 안 방 문을 걸어 잠그고는 나오지 않았다. 집 안이 또 한 번 전쟁통에 찬 공기가 맴도는 냉랭한 얼음판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내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지금부터의 이 시간이 제발 빨리 지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둘째가 마치는 시간에 맞추어 30년 직장 생활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조퇴를 하고 학교 앞에서 기다렸다. 하늘은 참 맑기라도 하지만 내 마음은 금방 소나기를 내릴 듯한 먹구름과 다름없었다. 자신이 저지른 잘 못을 인지 못하고 평상시 보다 더 많은 친구들 틈 사이에서 세상에서 가장 즐겁게 학교 정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둘째를 부르고
"오늘은 학원 가지 말고 잠시 아빠랑 어디 좀 가자"라고 마음 같아선 경찰서로 달려가 잘못을 깨우치고 마땅한 벌을 받길 원했지만 그러지 못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니 둘째를 태워 근처 패스트푸드 점으로 갔다. 뭘 먹을 건지 묻지도 않았다 평상시 언니가 즐겁게 너무 맛있다고 꼭 추천 메뉴라고 노래를 불렀던 메뉴를 둘째도 언젠가 먹고 말 테야 하며 마음 다짐을 했던 메뉴를 오늘 이래서야 먹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주문을 했다. "배고플 시간인데 얼른 먹자"내가 무슨 말을 할지 대략 짐작을 하고 있는 눈치로 손을 많이 떨고 있었고 눈동자도 한곳에 집중을 하지 못한 채 오매불망 주위를 살피는 듯한 불안해 보였다. 나는 둘째가 먹는 것만 바라보았다. 분명 배가 많이 고플 시간인데 얼마 먹지도 않고서는 그렇게 소원이라고 올해 꼭 먹어야 되는 버킷리스트라며 노래를 부르곤 했는데 그렇게 먹고 싶어 했던 추천 메뉴인데도 느끼한 소스가 자기 입에 안 맞는다며 그만 먹는다고 했다. 아마도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에 맛을 느끼지 못하고 목구멍에서 거부를 했을 것이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고 싶었다.
"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