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
서로 벙어리가 된 듯 각자 높은 빌딩만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을까! 너무나도 소심한 딸이 먼저 말을 꺼내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묵묵히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아빠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데 나 아니야 나 의심하지 마"
무슨 말을 할지 안다, 그리고 아니다. 이건 앞뒤가 맞지 않는 딸의 머릿속 전산상의 오류다.
"아빠가 널 의심하는 거 아닌데, 넌 왜 그렇게 생각하니?"
딸의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주기 위해 티슈를 들었다. 마음도 떨렸고, 손도 떨렸고, 심지어 불안한 장애까지 떨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날 좀 내 버려두면 안 될까 나 너무 힘들어 집에 있는 것도 힘들고 학교 가는 것도 힘들고 그러니까 제발 제발 나 한데 신경 쓰지 말고 냅 두면 안 될까"억울하고 외롭고 힘들고 많이 지친듯한 눈물을 흘리며 말을 했다. 그 눈물만 봐도 어디선가 잘 못 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깊은 생각에 빠지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화가 나는 마음을 진정시키도록 했다.
딸의 속 마음은 헤아리지 못한 나 자신이 너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도대체 뭐가 힘들고 외로운지 순간 어느 해 인가 장모님이 자주 가시는 점쟁이 집에서 둘째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사춘기를 심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 생각이 났다. 첫째는 사춘기가 뭔지 모를 정도로 청소년 시기를 보내서 둘째 또한 언니를 잘 따르고 잘 믿었기에 별 걱정을 하지 않았다. 미신을 잘 믿지는 않지만 어제 일조차 기억나지 않는데 왜 하필 이 순간 그 점쟁이의 말이 생각났는지 모른다.
사춘기의 시작은 작년부터인가 싶다. 중학생이 되면서 정말 친한 친구를 만났다며 너무 좋아했던 딸이었다. 옆에서 공부도 잘 가르쳐 주고, 서로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라며 매일 같이 친구 자랑을 얼마나 했는지 학교생활이 소심했던 큰 딸 보다 여중 학교생활을 너무 잘 적응하고 있는 거 같아 다행스러웠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공부하라는 부담스러운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좋은 친구 만나서 학교생활 잘하고 미움 다툼 없이 교우관계만 신경을 썼는데 성공적이다 싶었다. 그런데 이 친구를 주말이고 휴일이고 매일 같이 만나더니 또 다른 친구들이 많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이때부터 생활비 지갑에서 손을 대기 시작했고, 책가방 안에 공부할 교과서 보다 간식거리며 연예인 앨범과 사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심지어 딸에게 어울리지 않는 액세서리와 레이스가 달린 옷들 그리고 굽이 높은 구두가 책상 밑에 숨겨져 있었다. 참았다. 자신의 용돈으로 살 수가 없었던 물건들이었기에 의심은 했지만 그래도 딸을 믿었다. 그리고 문자메시지로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아빠는 또 알고 말았어. 아빠는 너를 믿고 사랑하는 마음 변함이 없어. 영원히 변함이 없을 거야" 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 무조건 믿고 싶었다.
책상 위에 적힌 작은 메모를 확인했다."나는 왜 사는지 모르겠다. 죽고 싶다. 내가 죽어도 가족들도 친구들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겠지, 나만 없어지면 세상은 더 아름다울 거야"
집에서는 힘들다는 내색 한 번 없던 아이가 갑자기 이 생각을 하고 있다니 너무 놀라고 심장이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하루는 딸 방에서 문을 잠그고 조용히 이야기를 시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정말 힘들거나 아빠 한데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하라고 그리고 아빠와 가족들은 언제나 네 편이니까 응원한다고" 말을 했는데...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를 못했다. 어떤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랐다. 이맘때 마음을 알아주고 마음속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면 덜 힘들어했을까! 사춘기를 싶게 이겨낼 수 있었을까!
엄마가 또 화 가 나 있다. 주방 싱크대에 늘 두었던 엄마의 가계부와 생활비 지갑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옮겨놓은 후로는 집안이 한동안 조용했다. 가족들의 대화도 행복을 찾아가고 있었으나 엄마 휴대폰 지갑에 넣어 두었던 10만 원이 또 없어졌다. 그 사이 여러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지만 참고 참았다. 자식이기에 믿었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며 믿었다.
정말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마냥 기다려 줄 수만은 없어 딸이 다니는 학원에 전화를 했다.
"집에 급한 일이 있어 지금 좀 마쳐 달라고 학원 밑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부탁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집으로 가는 길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서로 침묵을 지켰다. 집 주차장에서 내리지 않고 먼저 말을 꺼냈다.
"엄마 지갑에서 또 돈 꺼냈니?"어제 용돈 달라고 해서 줬는데 왜 또 그런 행동을 했어. 나쁜 짓인지 알아, 몰라? 뭐가 그렇게 널 힘들게 해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지 아빠는 도저히 모르겠다. 너를 이해하려고 했어 그리고 힘들거나 고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잖아"
딸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차 안에는 냉기가 맴돌게 너무 적막했고, 딸의 거친 숨소리만 들릴 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감정을 달래려고 노력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딸이 조심스럽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 뺏었다. 정말 큰 용기를 냈을 것이다. 그 용기에 나는 눈을 뜰 수 있었고, 어떤 말이든 받아주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들이 내가 돈이 없으면 안 만나주고 안 놀아줘. 나만 보면 자기들이 갖고 싶은 거 있다며 그 매장으로 데리고 가서 계산하게 만들어. 돈이 없다고 하면 그냥 나만 내 버려두고 자기들끼리 팔짱 끼고 가더라, 나는 친구라고 생각하면서 같이 놀고 싶은데 돈 있는 나를 원했던 거야"
순간 화가 났다. 이 가시나들을 당장 찾아가 머리끄덩이라도 잡고 경찰서에 집어넣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현실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딸도 눈물을 흘렸다.
"진작에 말하지 왜 그렇게 혼자 힘들어했니"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잘 못해서 나 혼자 극복하려고 했는데"
"그럼 이 친구들 버릴까 너를 이용해 먹은 거잖아"
"이 친구들이 없으면 나는 혼자야, 친구도 없이 학교를 가고 친구도 없이 학교 운동장에 혼자 앉아 있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