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출
힘들고 지친 한 주의 끝자락 금요일 저녁 모처럼 가족들이 다 함께 모여 즐겁게 텔레비전 예능 방송을 보면서 늦게까지 야식에 가족의 웃음소리는 화창한 봄날과 같았다. 남들이 말하는 소소한 행복을 나도 느낄 수 있었고 아빠로서 남편으로써 참 흐뭇한 시간에 행복의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먹다 남은 치킨 소스에 오래간만에 맥주 한 캔을 마시는데도 어떻게 이리도 맛이 있는지, 아마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맥주가 아니었을까. 다들 무거워 내려앉는 눈꺼풀은 어찌할 수 없었고
시간이 꽤나 늦어 모두 긴 하루에 감사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나 또한 아내 옆에서 "매일 오늘 같았으면 좋겠다"라는 말을 건네고는 아내는 많이 피곤했는지 금방 신나게 코를 골며 꿈속으로 떠났다. 나는 주말이 되면 새벽 5시에 일어나 배드민턴 클럽에 소속이 되어 있어 운동을 하러 간다. 그날은 주체할 수 없는 행복에 취해서인지 잠시 눈을 붙이고 시계를 여러 번 확인하면서 몇 번이나 깼다. 순간 깊이 잠이 들었는데
새벽 4시 30분쯤 되었을까 왠지 불안 한 기운의 문자 알림에 눈이 뜨였다.
"아빠 나 찾지 마! 당분간 삼촌 집 할머니 집에서 지내면서 학교 다닐게" 새벽에 미친 듯이 큰 소리를 치며 화를 몸 밖으로 내뱉고 싶었다. 세상모르게 자고 있는 아내를 깨우지 않은 채 딸에게 몇 번이고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그리고 수신거부 메시지가 여러 번 오면서 "전화받아라 이번에 안 받으면 진짜 너는 끝이야, 더 이상 용서할 수도 없고 집에 들어올 생각조차 하지 말아" 문자를 보내고 다시 전화를 했더니 받았다.
"어디니?"
"........" 말이 없었다.
"어디야 지금?" 다시 물었을 때
"자이언츠 파크 앞"
"알았어.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아빠 지금 갈게"
자이언츠 파크는 집에서 걸어 20분 이면 갈 수 있는 버스정류장이 있는 큰 상가건물이다.
나는 잠 옷 바람으로 차를 타고 자이언츠 파크 앞으로 가니 딸은 큰 캐리어를 끌고 가벼운 외투만 입은 채 바람이 거세게 부는 버스정류장 앞에 서 있었다. 곧 새벽이 밝아 오겠지만 지금 이 시간에는 아무도 없는 휑한 거리일 뿐 오직 바람 소리만 귀가에 들릴 뿐이었다. 캐리어를 잡고 딸을 차에 태웠다. 잠 한숨 못 자고 가족들이 언제 잠이 드는지 살피고는 모두 잠들었을 때 가출을 시도했던 모양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피곤에 지쳐 있는 딸에게 "피곤한데 얼른 자고 일어나면 이야기하자" 하고 다시 침대에 누우면서 새벽 운동은 포기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들지 못했고 딸 방에 현관문 종소리가 들리는지 온통 그곳으로 뇌신경이 집중되고 있었다.
새벽이 밝아 오면서 제일 먼저 딸 방문을 열었더니 오늘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조차 하지 못 한 채 떡진 머리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그냥 차라리 새벽일은 잊어버려라 잊어버려라" 하고 혼잣말로 중얼 그렸다.
8시쯤 되었을까! 자고 있는 아내의 전화벨의 발신인은 장모님이다. 아내 입장에서는 휴일 이 시간이면 새벽이나 다름없는데 잠 결에 전화를 받고는
"민이 왔나?"
"민이가 왜 이 시간에 어딜 가?"
이 녀석이 가출을 시도하면서 5시 첫 시내버스를 타고 장모님 댁으로 가려했다며
"할머니 나 집 나왔어 첫 차 타고 갈게" 문자를 남기고는 장모님은 무슨 일인가 싶어 우리 부부가 자고 있을 시간이라 전화를 하지 못했고 첫 차가 도착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오지 않아 전화를 했다고 했다. 이제야 사태 파악이 된 아내는 둘째가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며 물었다.
나는 자초지종 이야기를 했고 아내는 긴 한숨을 내쉬시면서 일단 자고 있으니 일어나면 나보고 이야기를 해 보라고 한다. 아내가 말을 못 하는 건 지금 많이 참고 있다는 거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감정을 달래고 있는 아내에게 고마웠다
마음속의 상처들이 아물어질 틈 도 없이 자꾸만
곪아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멍청하게 소파에 기대어 잠깐 눈을 붙이고 떴을 때 시계는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둘째를 깨웠다.
"민아 이제 일어나야지. 그리고 아빠랑 이야기 좀 하자"
"날 그냥 오늘은 내버려 둬 왜 내 마음을 몰라줘"
"아니 어떻게 말을 안 하는데 네 마음을 알 수가 있니? 아빠도 속상해 언니는 안 그랬는데 너만 왜 이러니"
"또 언니 언니 이야기 좀 그만해 언니보다 못하니까 내가 이 집에 나가면 되겠네"
딸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최대한 분노와 흥분을 내려놓고 조용히 이야기하려 했다.
"그런 게 아니잖아 예전에도 말했듯이 언니는 언니대로 동생은 동생대로 엄마 아빠는 너에게 사랑을 더 준다는 걸 모르니"
항상 난 둘째가 먼저였다. 과일이 있어도 둘째 입에 먼저 넣어줬고 찰진 밥을 퍼도 둘째 밥을 먼저 펐고 옷을 사도 둘째 옷을 먼저 샀는데 이게 관심이고 사랑인지 알지 못했나 보다.
딸은 이불을 박 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일단 저 캐리어 아빠랑 같이 풀면서 이야기 좀 하자"
며 구석에 넣어 둔 캐리어를 끌어다 놓고 이야기를 풀어 나갔다.
"왜 이렇게 짐을 가득 싸서 가출을 생각했어? 언제부터 생각한 건데"
"......"
또 침묵이다. 딸은 풀어야 할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으면 입을 닫아버리는 습관이 있는데 또 입을 닫아 버렸다.
"한 달 전부터 생각했어 친구 집에 놀러 갔는데 친구 부모님들이 친구에게 공주야 공주야 부르며 너무 다정해 보였는데 엄마 아빠는 언제부턴가 살찐 내 모습에 남처럼 대하는 걸 느꼈어. 그리고 언니랑 동생 한 데만 조용히 이야기하면서 왜 나한테만 책상 치워라, 방 치워라, 그만 좀 먹어라. 그런 말이 지겹도록 듣기 싫었다고"
"......"
내가 할 말이 없었다.
"그럼 네가 뭘 하던 네가 원하는 대로 냅 둘까 너에게 관심 없이 냅 둘까 그게 아니잖아 너를 딸로 생각 안 하면 왜 그런 말을 하겠니. 그런 말들이 너에게 상처가 되었다면 이제부터 고운 말로 더 사랑스러운 말로 고칠게 상처 준 거 정말 미안해 그런데 다시는 가족들 걱정하지 않게 가출 안 했으면 좋겠어"
짐도 참 많았다. 옷, 책, 연예인 애장품 등등
장모님 댁에서 학교까지 버스로 1시간을 넘게 와야 되는데 철없는 딸의 가출에 심장이 떨어졌다 다시 붙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