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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하고 있다

설레임

by 등대지기

30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무슨 말을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 해지면서 30초라는 이 짧은 초침 소리가 마치 30시간을 넘어가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선생님댁에 말하지 못할 가슴 아픈 사연들이 무엇일까! 갑자기 마음이 너무 찹잡해졌다. 선생님의 눈가에는 이미 말하지 못할 서운하고 외로운 눈물이 이른 새벽 깨지 않는 맑은 이슬방울처럼 맺혀 있었고 너무나 말라 있는 앙상한 얼굴 볼살에도 외로운 울림이 보였다. 비록 이제 얼마 되지 않은 만남과 인연 사이로 참 많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직은 꽁꽁 숨겨 놓은 서로의 속 마음을 나누기에는 짧은 만남이 아닐까 하는 나의 생각은 큰 오산이었다. 외로워 보이는 선생님께 오늘만큼은 오랜만에 마시는 술의 힘을 빌려 아픈 상처를 보듬어 주는 감히 말할 수 없는 큰 느티나무가 싶었다. 아니 작은 아기 솔 나무라도 좋으니 옆에서 뜨거운 날에는 그늘이 되고, 추우 날에는 따스한 햇살이 되고 싶었다. 그동안 표현하지 못했던 속앓이를 가지고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고 외로웠을까.

선생님은 "어 미안, 미안 배고플 텐데 얼른 시켜 먹자. 원래 외식보다는 늘 집에서 아내랑 인생 이야기하며 같이 먹는데 오늘만큼은 자네를 만나 자식같이 느껴져서 손을 놓을 수가 없더라 구 처음 봤을 때는 이 녀석 잘할까 내심 걱정했는데 부지런하게 새벽에 곧장 잘 나오고 말이야. 요즘 젊은 사람들이 쉬운 일을 선택하려고 하지, 어디 힘든 일을 하려고 하는가, 아무튼 우리의 생각이 짧아 하루 나오면 그만 나오겠지 했는데 자네 덕분에 우리들의 생각과 평균 나이가 줄어드니 참 고맙네" 선생님은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고맙다며 말을 무한 반복으로 건네주었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 김치 버섯전골이 나왔고 주방 이모가 정말 맛으로 자랑할 만한 다양한 밑반찬이 큰 테이블 위에 비좁게 가득 찼다. 텅 빈 방 안에서 혼자 늘 라면만 먹던 내가 이렇게 호강스럽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되는지 젓가락이 쉽게 잘 가지 않았다. 선생님은 식는다며 배고플 텐데 어서어서 먹으라며 성장기 사춘기 아들 밥 먹이듯 어서 먹고 더 많이 먹으라며 앞에 음식을 밀어 놓아 주었다."아닙니다 많이 먹고 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감사하며 많이 먹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많이 드십시오"라고 몇 번이고 지겹지 않은 감사의 인사를 연거푸 했다. 오랜만에 식사 다운 식사로 목구멍이 호강이라도 한 듯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그동안 나 자신이 너무 부끄럽게 싫었는데 늘 감사했던 마음가짐의 큰 선물을 받는 거 같았다. 선생님도 기분 좋게 천천히 음식을 바라보며 허기진 배를 채우고 계셨다."자 한 잔 받게" 나는 두 손으로 소주잔을 들어 소주 한 잔을 받으며 고개를 돌려 소주잔에 입을 대고 놓았다. 시원하게 목구멍으로 타고 내려가는 소주가 참 쓰면서도 돌덩이처럼 단단했던 육체를 녹여주는 거 같았다. 선생님께도 한 잔 따라 드렸더니 선생님은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며 반 잔을 드시고는 잔을 내려놓으셨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뚝배기 안에 꽃처럼 활짝 퍼진 버섯을 하나 건져 숟가락과 젓가락을 이용해서 반으로 나눠 내 밥 위에 한 조각 선생님 숟가락 위에 반 조각이 올라갔다. 그리고 적당히 익은 고기도 떠서 내 밥 위에 올려놔 주셨는데 소문난 맛집인지 입안에서 샤르르 녹는 게 혼자 먹기에는 너무 아까운 음식으로 그녀가 생각났다. 밥이나 먹고 다니는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순간 그녀를 잊고 있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찾고 있는 낯선 향수의 그녀. 너무나 생각나는 사람들이었다. 선생님은 "새벽에 일어나서 나오는 거 힘들지 나도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었는데 새벽에 꼭 나와야만 되는 이유가 있었네 어떻게 말을 꺼낼까 그리고 자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그냥 마음속에 쌓여 있던 속앓이를 근심 걱정이 속 시원하게 입으로 나오네 흐흐 같이 저녁이나 한 번 먹자고 했는데 미안하네" 갑자기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감히 내가 누군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같이 웃어주고 같이 눈물을 흐려주고 지금의 시간을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기에 무슨 복에 겨워 선생님 앞에 앉아 이토록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는지. 선생님께 너무 감사했다. 술 도 한 잔씩 마시게 되고 배가 부르다는 기분이 들면서 선생님께서는 큰 딸이 대학을 가면서 원하는 학교와 원하는 전공에 합격을 해서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대학 생활하면서 꽃 피는 아름다운 20대 청춘의 나이에 남자친구를 잘 못 사귀어 인생이 마구 꼬여버렸다며 그 나쁜 놈 찾느라고 학교도 휴학하고 전세금 빼서 월세로 이사하고 선생님 가족과 연락 끊은 지 제법 오래됐다고 했다. 학교 근처 자취방과 학교 주변을 많이도 돌아다녔지만 그림자도 흔적도 찾아볼 수가 없었단다. 경찰에 신고도 하려 했다고 했지만

간혹 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문자메시지와 음성 메시지가 온다고 하니 마음의 정리가 되면 꼭 돌아오겠지라는 생각으로 기다린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에 청소 일을 하는 것도 혹시나 딸을 우연히 라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셨다. 하지만 몇 년을 새벽 무을 열었지만 아직까지는 못 봤다고 행복한 대학 생활 속에 나쁜 남자친구로 인해 방황하며 모든 것이 유리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진 듯 삶이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20대 아름다운 대학 생활 정말 어떤 녀석인지 내가 찾아서 때려죽이고 싶었다. 나는 조심스레 "선생님 꼭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정리되지 못 한 삶이 아니라 부모님께 너무 죄송해서 못 만나는 거 일 수도 있으니 걱정 마세요" 위로의 말이 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 또한 곧 돌아올 거라 믿었다. 선생님은 지금 우리의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선생님 저도 예전에 잠시 이야기드렸지만 아버지 돌아가시고 객지로 공부하겠다고 올라와서는 어머니께서 힘들게 농사일하셔서 대학 등록금 내어 주시고 그것도 부족하면 소 팔아 대학 등록금을 내어 주셨는데

저는 철도 없이 용돈 받아 베짱이처럼 매일 먹고 놀기만 했죠. 취직해서 어머니께 효도하며 지내야 하는데 지금도 어머니 눈앞에는 오로지 제 걱정만 하고 계신답니다. 정신없이 영혼을 잃을 정도로 인사불성 술에 취해 어떻게 됐는지 아직도 알 수 없는 미스터리로 눈 뜨 보니 낯선 어느 방 안이더라고요. 어느새 한 달이 되어 가는데 누구 집인지 집주인이 누군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답니다. 어느 여성분이라는 사실은 가끔 제가 없을 때 와서는 빨랫줄에 걸려 있는 그 사람의 속 옷을 보면 여성분인가 싶더라고요. 그 동 안 이 분께 많은 죄를 지었는지 아니면 엄청난 잘 못으로 벌을 받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요 이 사람 덕분에 제가 드디어 철이 들어가고 선생님을 만나고 제 스스로 찾아간 주유소 아르바이트까지. 참 고맙기도 하고 그동안 저로 인해 고생하고 흘린 눈물 다 주워 담아 주고 싶더라고요. 저 철든 거 맞죠"

선생님은 우리 딸이 너 같은 사내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면 좋을 텐데 왜 정신 나간 사람을 만났는지. 선생님과 나는 또 한 잔의 술을 마시면서 서로의 손을 잡고 "우리 잘 이겨 내 보자

나는 너를 만나 참 고맙고 자식 같아서 참 좋네. 그리고 마음이 많이 답답하고 근심 걱정도 많았는데 너무 고맙게 오늘만큼은 그런 걱정 없이 잠도 잘 올 거 같다네" 어느새 전골 찌개는 약간의 국물로 밑바닥만 남았고 빈 소주병도 2병이나 줄지어 있었다. 제법 시간도 흘렀다 이대로 집에 가는 게 서운하고 슬프기도 했지만 선생님을 기다리는 사모님 생각에 얼른 보내 드리고 싶었다. 선생님은 내일 보자며 인사를 하고는 급하게 내 손에 택시라도 타고 가라며 만 원짜리 몇 개를 쥐여 주셨다 나를 반성하고 선생님과의 소중한 시간을 간직하며 아뿔싸 선생님 따님 찾아 나서기에는 사진이 필요한데 하며 무릎을 탁 친다. 시원한 초가을 바람과 함께 걷던 1시간을 머릿속 생각을 정리하며 집에 도착했고 못 보던 조그마한 여성분의 운동화가 나란히 놓여 있으며, 늘 외롭게 홀로 불 꺼진 지하방에 불이 켜져 있다. 그녀가 왔을까! 나는 지금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터질듯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 발 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머물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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