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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하고 있다

by 등대지기

오늘도 시간에 대한 개념을 잃은 채 정말 고단하게 긴 한숨 속에 하루를 보낸 거 같다. 차량이 평상시 보다 더 많이 들어온 이유와 친절하게 업무를 잘한다며 소장님의 권유로 1시간 연장 근무와 아르바이트 비 만 원 추가를 하고 집으로 왔다. 삐그덕 대는 손가락 관절을 꼼지락꼼지락 하며 이제야 마음속 여유를 찾아본다. 몸에 온갖 기름냄새들로 코 끝이 시큰해지면서 콧구멍 속을 엄지손가락으로 비벼 보니 시커먼 게 마치 광촌속 석탄을 연상케 하듯 손가락 끝이 연탄의 일부분처럼 보이고 연거푸 재채기가 나온다. 좁은 방 안은 짧은 시간 안에 눅눅한 냄새들로 가득 차 인상을 찌푸리게 했고, 창문을 열었더니 바람이 제법 차가워졌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열대야로 자는 둥 마는 둥 했던 7월 초부터 9월 말까지 이 여름이 언제쯤 지나갈까 하며 그렇게 땀과 사투를 벌였던 지독한 여름도 이제는 나뭇가지 끝자락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 같다. 아직까지 녹이 쓴 주방 수도꼭지에 힘을 주어 돌려보며 속 시원하게 꽐꽐꽐 정도는 아니지만 겨우 몸에 비누칠을 하고 씻을 수 있는 물이 나왔다. 작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몸은 금방 만들어진 번데기 같아 보였다. 순간 이 시간에 이 사람이 문을 왈칵 열고 들어온다면 소름이 돋는 상상을 하면서 얼른 가벼운 옷차림으로 환복을 하고 저녁 준비를 했다. 근사하게 준비할 것도 없이 늘 그랬듯이 라면에 찬 밥 한 덩어리가 다였다. 어릴 적 지겹도록 먹었던 어머니의 큰 멸치 시래깃국이 생각났다. 한 겨울 김장하고 남은 배추 끝을 담벼락이나 마당에 말려놓고 겨울 찬 바람에 얼고 잠시 동안의 겨울 햇살에 녹기를 반복하며 단 맛이 자연스레 물들었던 시골말로 시래기 도시 말로 우거지였던 시래깃국을 매일같이 큰 가마솥에 얼마나 끓였던지 분명 시래기와 소금 한 주먹 그리고 손가락만 한 멸치만 끓였을 뿐인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쩜 그렇게 구수한 맛이 났는지 밥 상 위에는 시래깃국 한 그릇씩 큰 대접에 밥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금방 담은 김장 배추가 바가지 안에 담겨 엄마가 침을 묻히고 찢어 밥숟가락 위에 돌돌 말아 얹어줬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왜 그렇게 먹기 싫고 국 위에 뜨 다니는 멸치가 징그럽게 보기 싫었는지 계란 반찬을 해 달라고 떼를 썼던 철 없이 보낸 시절이 참으로 후회스럽다. 그렇게 멸치가 보기 싫었음에도 학창 시절 도시락 반찬에 또 멸치가 담겨 있었고, 친구들과 나눠 먹는 도시락 뚜껑을 열기가 부끄러워 속이 안 좋아서 밥을 못 먹겠다는 핑계를 둘러댔던 철부지 시절이 참 죄송스럽게 느껴진다.

뱃가죽이 등에 찰싹 붙은 하루라 매일 먹는 라면이지만 오늘따라 더 맛있게 잘 익은 거 같다. 가스레인지 압력 밥솥의 밥 알이 어제까지만 해도 꼬들꼬들 윤기가 좌르르 났는데 하루 지난 오늘의 밥 알은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약간 노란색으로 빛깔이 변하는 듯 시름시름 앓아가고 있는지 금방이라도 쉬어 못 먹을 거 같았다.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라면 면발을 다 먹은 후 라면 국물에 찬 밥을 말아먹었더니 역시나 배가 부르니 모든 게 행복했다. 발로 빈 그릇을 구석으로 몰 안 넣은 후 얼룩진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코를 골며 나도 모르게 꿈속을 헤매고 다녔다. 얼굴도 모르는 낯선 어느 여성분과 포장마차에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심각한 인생 이야기를 하며 소주잔이 깨질 듯이 "이 세상은 내 것이요, 너도 내 것이다. 덤벼라 세상아" 무서울 것 하나 없이 코가 삐뚤어져라 그 여성분과 1차 2차 3차를 새벽까지 마시고 있었지만 정신만은 멀쩡한 게 신기했다. 이미 세상을 포기한 듯 정신줄을 놓아 버린 이 여성분을 모텔로 데려다주고 나오려는데

"잠시만 가지 마 오늘 내 옆에 있어주면 안 돼, 오래도록 사귀고 마음도 몸도 다 바쳤던 그 새끼 한데 차였다고... 내가 이제는 보기 싫데, 지긋지긋하데, 이제 나한테 도망가고 싶데, 내가 뭘 그렇게 잘못을 했는지 빌어먹을 이 새끼 공무원 준비한다고 직장에서 받은 월급 모두 이 새끼 공무원 합격 시킬 거라고 다 받쳤는데 몇 년 동안 독서실 태워주고, 도시락 싸 주고, 뒤 따라다니며 엉덩이 똥까지 닦아 줬는데 개새끼 공무원 시험 합격했다고 이제는 내가 싫다며 싹 돌아가는 거 있지. 그래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며 내 팔을 붙잡고는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쌓여 있는 많은 응어리를 풀어헤치는데 혼자 두고 갈 수는 없었다. 토닥토닥 속상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재우고 나가려 했으나, 얼마나 억울한 사연이 많은지 쉽게 잠들지 못하고 그만 오늘 마신 술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는지 화장실로 대피도 하기 전에 방바닥으로 폭포수처럼 쏟아붓고 말았다. 바닥에 깔린 이불이랑 이 사람의 옷 가지들이 모두 토를 받았고, 난감한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고민에 빠져 있는 순간 "에이 뭐야 하며 술에 취한 채 토가 묻은 옷가지들은 하나 둘 모두 벗어던지더니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흔들어 깨우려 했지만 속옷마저 벗어던진 채 꼬부라져 자고 있는 형체를 흔들 수가 없었다. 산 짐승의 먹이를 코앞에 둔 늑대처럼 엉큼한 마음이 들었다. 술에 취해 여기까지 나를 끌고 데리고 왔다면 본인의 육체를 나누고 싶은 게 아닌가, 먼저 오늘 마신 술과 안주뿐 만 아니라 며칠 동안 위장 속에 쌓인 많은 물질들을 치우기로 했다. 내일 이 방에서 벗어나면 이불은 어찌 알아서 할 테고 토로 얼룩진 옷가지와 속 옷을 작은 욕실에 앉아 코를 막아가며 비치된 샴푸를 풀어 세탁을 했다. 이게 무슨 꼴인가 짧은 시간 안에 대충 세탁한 옷가지들은 젖 먹던 힘까지 모두 짜내어 꽉꽉 물기를 없애고 깨끗한 이불 안에 넣어 빨리 물기가 없어지기를 바라며 밟고 또 밟았다. 지금의 이 노동의 보상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저 여자분의 몸뚱어리로 눈길이 갔다. 과도한 욕심과 성욕이 불타오르면서 웃통을 벗 어려할 때 귀를 의심해야만 하는 문자 메시지 하나 "내 곁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평상시에 다르게 왜 이렇게 크게 들리는지 황홀했던 꿈을 깨고 말았다. 얼마나 잤을까 금방 어둠이 내려앉았고 다시 그 꿈을 꾸고 싶었지만 꿈속의 그 여성분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꿈인 줄 알았다면 꿈속에서 그 여성분과 손이라도 잡아 볼 걸 아니 입술이라도 몸이라도 포개 볼 걸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번데기 같았던 몸뚱어리 한 곳이 번데기 허물을 벗고 하늘 높이 날면 한 마리 새와 같이 하늘을 비상할 거 같만 같았다. 모처럼 신기하게 몸의 변화가 온 날이었다. 얼른 다시 눈을 붙이고 새벽 선생님과 함께 할 환경미화를 하면서 또 무슨 이야기로 인생 공부를 할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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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