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당을 집이라 부르게 되면
예전에 중국집 가면 꼭 나서서 이렇게 묻는 사람 있었다.
"짜장면 먹을래 짬뽕 먹을래?"
다들 짜장면을 말하지. 중국집에는 짜장면만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다른 걸 얘기하면 눈치 없는 인간이 돼버리지.
"난 짬뽕" 이 정도 돼야 고슴도치라 불릴 자격이 있지.
그런데 막상 짬뽕을 얘기하면 한 가지로 통일하래.
그래야 빨리 나온다고.
그럴 거면 왜 물어봐?
끝내 먹고 싶던 짬뽕을 먹은 날.
짬뽕 국물처럼 매운 눈초리에 고슴도치의 가시가 한 움큼 빠진 날이다.
우리는 중국 음식점을 중국집이라 부른다. 예전에는 중국 화교인들이 중국 음식을 만들어 팔아서 그렇게 불렀을까? 그게 다가 아니다. 돼지국밥집. 떡볶이집. 김밥집처럼 메뉴 뒤에도 '집'이 붙어있다.
왜 메뉴 뒤에 집이라는 단어를 붙였을까?
한국의 초기 식당들이 대부분 가정집의 방 하나를 내어주며 시작한 것에서도 유래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식당이나 메뉴의 이름 뒤에 '집'을 붙이는 행위는 한국어만이 가진 독특하고도 따뜻한 인문학적 정서를 담고 있다. 거기에는 식구(食口)의 개념을 담고 있다.
한국인에게 '집'은 단순히 잠을 자는 곳이 아니라,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식구)이 모이는 장소다. 식당 이름 뒤에 '집'을 붙이는 것은 그곳을 단순히 상업적인 공간으로 보지 않고, 주인의 손맛과 정성이 깃든 '가정의 연장선'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상점'이 거래를 목적으로 한다면, '집'은 환대를 목적으로 한다. "국밥 한 그릇 먹으러 가자"가 아니라 "국밥집 가자"라고 할 때, 우리는 그 공간이 주는 푸근함과 비격식적인 편안함을 동시에 소비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집' 같은 공간에서 우리는 격식을 내려놓고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다.
편안한 집에서 왜 "통일"을 강요할까?
앞선 에피소드에서 언급한 '짜장면 통일'의 강요 역시, 역설적으로 그곳이 '집'처럼 편안하고 격식이 없기에 벌어지는 한국식 집단주의의 단면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곳을 '집'이라 부르는 순간, 식당 주인과 손님 사이에는 묘한 가족적 관계가 형성된다.
집(가정)에서는 보통 엄마가 해주는 메뉴로 끼니를 통일한다.
이러한 정서가 식당으로 옮겨오면서, 주인의 편의를 생각해 주고 빨리빨리 먹고 일어서는 것이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식구' 같은 미덕으로 둔갑해 버리는 것이다.
한국인의 우리' 의식은 공간에서도 나타난다.
고 이어령 교수님의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는 한국인의 '우리' 의식을 강조하며, 공적인 공간을 사적인 공간(집)으로 끌어들이는 한국인의 언어 습관을 이야기하고 있다.
식당을 '집'이라 부르는 것은 타인이 운영하는 영업소를 나의 사적 영역인 '집'처럼 친숙하게 수용하려는 심리적 기제가 작용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함께 밥을 먹는 공간은 그냥 집이 아니다. 우리 집이 되어버린다. 그곳에서 밥을 먹는 사람도 밥을 주는 사람도 함께 '우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 그날 나는 '우리'가 되지 못한 사회성 없는 고슴도치였던 것이다. 남들 눈에는.
얘기할걸 그랬나? 돼지고기보다 해물이 너무 먹고 싶었다고 말했으면 달라졌을까?
오늘도 한 움큼 가시 빠져나간 자리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잠자리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