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패스트 라이브즈(2023)> 리뷰
‘당신의 인생에서 한 평생 잊지 못한 사람이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자기만의 답을 내놓는다. 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그 ‘누군가’가 존재하던 과거로 돌아가는 행동에 대해서는 망설임을 표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들이 망설이는 이유가 바로 그 시절 속 '누군가'와 지금의 나라는 두 사람 간의 결별을 미루고 싶기 때문이라는 진심을 대신해서 전달해주는 영화다. 즉, 이 이야기는 연애를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두 인물이 사랑을 위해 돌아서는 이야기이다.
셀린 송 감독은 발걸음을 돌리는 이들의 물리적이며 심리적인 간극을 단순히 투 샷의 프레임 중앙을 비우는 것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브루클린 브릿지나 자유의 여신상 등의 거대한 물체들을 투 샷의 미장센 속에 등장시킴으로써, 두 사람 사이의 공백보다 더욱 크고 무거운 시간과 공간의 침묵의 무게감을 화면 속에 시각화한다. 즉, 그들 간의 공백으로 인해 그들은 서른여섯 살의 어른으로 성장했으나, 여전히 그들은 열 두살의 시간 속의 서로만을 마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이 두 사람은 두 개의 언어로써 서로를 구분하고, 다른 두 곳의 공간에서 각자만의 삶을 영위해 나가며, 또 다른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거대한 바다에서 갈라져 다시는 영영 손을 맞닿을 수 없을 것 같은 두 개의 강줄기가 된 남자와 여자는 타인에게 투영된 자신의 과거로 인해 서로에게 두 번 이끌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이전에 미처 꺼내지 못한 작별인사를 건네기 위해 마지막으로 서로에게 향한다. 다신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아름다웠던 그들의 ‘전생들’에게 따스한 ‘안녕’을 말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이들은 두 명의 ‘연인’보다 더 깊은 두 명의 ‘인연’으로써 서로에게 남게 된다.
서울에 살던 열두 살의 문나영(문승아 역)은 가족의 이민으로 인해 좋아하던 정해성(임승민&유태오 역)과 이별하여 미국으로 떠나 노라 문(그레타 리 역)으로 살아가게 된다. 뉴욕의 단칸방에서 예술인을 꿈꾸는 스물네 살이 된 노라는 아버지의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찾던 해성을 발견하고 그와 화상통화로 연락을 이어가다 모종의 이유로 연락을 그만두게 된다. 이후 노라는 작가 레지던스로 거처를 옮기며 그곳에서 아서 자투란스키(존 마가로 역)를 만나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비슷한 시기 해성도 중국으로 넘어가 그곳에서 만난 여인과 연애를 한다. 이후 십이 년이 지나고, 해성은 뉴욕에서 아서와 결혼한 노라와 열두 살 이후로 처음 재회한다. 그리고 그와 그녀는 이틀 동안, 서로에게 미처 건네지 못한 말들을 건넨다.
이 영화의 주된 주역은 ‘공백’과 ‘침묵’이다. 이 두 개념은 노라와 해성뿐만이 아니라, 해성과 아서에게도 적용된다. 노라와 해성의 공백은 24년의 시간과 태평양이라는 공간이다. 이들은 열두 살의 호감을 이어받아 스물네 살에 로맨틱한 내음을 풍기다가, 서른여섯 살에 그 모든 향기 속으로 빠져든다. 해성은 비행기를 타고 중국으로 가거나, 뉴욕으로 갈 때, 그리고 마지막 씬에서 퇴장할 때에도 좌측으로 움직인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노라는 스튜디오로 걸어가기 위해 우측으로 움직인다. 두 인물은 서로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며, 해성은 과거를 향해 나아가고 노라는 그와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 해성과 반대로, 아서는 노라가 나아가지 못하고 정체하고 있을 때 그녀의 인생에 등장한다. 비슷한 직업군이라는 동질감을 넘어서, 아서는 해성과 달리 노라와 같은 방향으로 발을 맞춰 걷는다. 노라에게 아서는 미래인 것이다. 영화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상징하는 해성, 노라, 아서를 작중 후반부 바 장면에 한 프레임 속에 담아 병치되는 시간의 여러 흐름을 동시에 포착한다.
“너다.” 해성과 노라가 24년만에 꺼낸 첫 말이다. 그들의 재회는 기쁨보다는 당황에 비중을 둔다. 그리고, 당황은 침묵을 낳고, 침묵은 매우 보편적인 문법으로써 그들 간의 거리를 유지한다. 두 인물의 전생이었던 열두 살의 마지막 갈림길에서의 앰비언스를 장악한 적막은, 스물네 살의 노라의 컴퓨터 화면 속 어둠으로 사라지는 해성의 모습이 된다. 즉, 두 인물의 두 번의 사랑은 침묵처럼 마무리되었다. “너다.”라고 내뱉은 대사는, 두 인물 속에는 항상 서로가 존재했었으나 이들의 미약한 연대는 고요로써 현현하였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요와 적막 그리고 침묵은 두 인물의 시차라는 내러티브적 요소와 그것이 주는 공허함을 더욱 부각시킨다. 같은 하늘 다른 시간에 산다는 시간적 지연으로 인한 단절감은 첫 화상 통화의 지연과 “서울 가는 비행기만 보고 있다”는 노라의 대사처럼, 두 인물의 호감과 사랑의 기저에 그것보다 더욱 큰 외로움을 키운다. 해성과 노라는 서로를 너무 사랑했다. 하지만 침묵의 농도와 빈번함이 더욱 짙어질수록, 유대감으로 엮어 놓은 둘 만의 시간은 점점 지연되며 그들이 살아가는 하늘과 닮아간다. 결국 그들은 ‘지연’으로 인해 시간축이 단절되며, 이는 곧 다른 세계에서 각자만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수공간의 빈번한 노출을 통해 공간의 거리감과 시간의 비가역성을 암시하며, 이로 인해 변화한 등장인물들의 자아 위에 과거의 그들을 투영하거나 반사시킴으로써 비춰지는 간극을 조명한다. 영화에서 수공간은 관계의 간극, 정체성의 유동성, 시간과 기억 그리고 존재에 대해 질문하는 요소로 사용되며, 이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길가의 물웅덩이에 비친 어렸을 적의 나영이와 해성은 뉴욕의 이스트 강물 위에 반사된 노라와 해성과 동일한 사람인가?' 라는 질문의 해답에는 테세우스의 배가 연상되기도 한다. 이처럼 셀린 송 감독은 수공간이 가진 서브텍스트의 ‘양면적인 성질의 무의미성’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은 경계이자 연결의 매개이며 자아성찰과 다른 삶의 가정(假定)과 미련을 나타내기에, 마치 제로섬 게임처럼 작중에 등장하는 여러 수공간이 내포하는 바의 양극성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교의 무의미로 인해, <패스트 라이브즈>는 해성과 나영, 해성과 노라 사이의 두 번의 전생과도 같은 만남과 이별 그 자체를 긍정한다. 그리고 이는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추억으로써, 누군가에게는 잊어버린 정체성으로써 서로의 삶과 각자의 길로 향하는 두 인물의 미래를 응원하게 만들며, 스크린을 넘어 모든 사람들의 과거와 미련에게 아름다운 이별을 다짐할 수 있는 용기를 건넨다.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화이지만, 셀린 송 감독의 일화에서 피어난 일종의 자전적인 스토리이자, 두 언어를 넘어선 이민자로써의 정체성을 고뇌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국어로 잠꼬대를 하는 노라를 보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꿈을 꾼다는 것은 그녀의 마음 속에 자신이 갈 수 없다는 것과, 열 두 살의 울보 나영을 알고 싶어 하는 침대맡에서의 아서의 말과, “20년 전에, 난 그 애를 너와 함께 두고 온 거야.”라는 노라의 대사를 통해, 한국어를 쓰는 ‘문나영’과 영어를 쓰는 ‘노라 문’은 각자 해성과 아서를 사랑하는 별개의 사람이자, 그 둘은 의도적으로 서로를 동일시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두 자아를 구분하는 것은 다름 아닌 '언어'이다.
언어는 단순히 그것을 능동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그 언어를 향유하는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사고하는지 이해하고, 그들과 같이 생각하고 말함으로써 - 즉, 그 언어의 문화권에 완전히 발을 딛음으로써 그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즉, 나영과 노라의 생각은 같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패스트 라이브즈>는 두 언어와 문화의 차이와 그 간극에서 오는 불협화음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그 불협화음을 넘어 두 개의 언어와 문화권을 겪은 이민자로써 제3문화에 속하는 ‘노라 문’의 역사와 정체성을 해석하는 영화이다. 영어와 한국어는 나영과 노라를 복잡하고 혼란스럽게 엮음으로써 그녀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물쇠이나, 해성과 아서가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려고 시도하자 두 개의 언어는 비로소 그녀의 정체성을 일목요연하게 연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되기도 한다.
노라는 해성과 재회한 후, 의도적으로 그의 시선을 회피한다. 시간이 지나고 알지 못하는 서로의 과거를 공유하며 두 명의 엇갈리는 시선은 점점 맞아 떨어지고 결국 교차한다. 그리고 진정한 시선의 교차는 당황과 어색이라는 감정으로 인한 겉을 맴도는 대답의 연속이 아닌, 바에서의 '진정한 대화'로 변모한다. 하지만 노라와 해성의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아서의 존재가 필수적이다. 노라는 해성과 함께 나영이라는 자아를 20년 전에 두고 뉴욕으로 왔고, 해성은 노라가 유령처럼 취급해버린 서울에서의 열두 살 '문나영'의 자아를 데리고 뉴욕의 노라에게 당도했다. 노라가 해성의 눈길을 피해 고개를 반대로 돌리면 그곳에는 아서가 앉아 있다. 그녀는 노라의 자아로써 아서를 마주하기에, 해성이 데려온 나영의 자아는, 노라의 몸을 빌려 아서에게 “20년 후에, 나는 그녀로써 너와 함께 보낸 거야.” 라는 말을 건네는 것이다. 이 순간 노라라는 육신의 나영과 노라는 별개의 자아로 구별되고 구체화됨과 동시에 노라가 서울에 두고 와 잊어버렸던 문나영이라는 아이는 그녀 속에 언제나 잔존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노라는 문나영이라는 열두 살 소녀로부터 태어나고 성장한 것임을 이해하고 인정하게 된다. 해성과 노라가 한국어로 대화하고 이를 아서에게 영어로 대화하는 씬에서 노라는 고개를 돌릴 때 마다 나영과 노라의 자아, 그녀의 과거와 미래를 넘나듦과 동시에 그들을 연결하는 그녀의 자아로써 '노라 문'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관객에게 상기시킨다. 이는 이후 해성이 건네는 과거와의 작별로써 안식을 받아 든 나영이 노라로써 아서에게 안겨 눈물을 흘림으로써, 아서는 12살 시절 울보 아내를 처음으로 마주한다. 즉, 그들은 세 명의 인연이자 한 여자를 사랑하는 두 명의 남자가 된다. 그리고 그들이 사랑하는 그녀의 내면을 알기 위해 해성과 아서는 서로의 존재를 인연으로써 이해하게 되고, '노라 문'의 내면을 열기 위해 그녀에게 마지막 안녕과 진정한 이해를 건넨다. 이는 '노라 문'에게 '선물' 같은 시간과 존재로써 변모하게 된다.
작중 마지막 장면, 택시를 기다리는 2분 동안의 기다림과 공백은 해성에게 ‘안녕’을 건넬 시간을 갖게 해 주고, 마지막 인사가 필요한가에 대해 의문을 버리지 못하는 노라에게 이를 받아들일 준비를 돕는다. 이후 택시는 좌측으로 향해 해성을 태우고 그를 과거로 실어 나른다. 그러나 그것이 태운 것은 해성뿐만이 아니라, 과거의 노라. 즉, ‘문나영’과 그녀가 떠나 보낸 24년 전의 과거였다. 이때 해성의 "야!" 를 기점으로 플래시백을 통해 돌아간 서울의 골목은 실제로 그들이 마지막 인사를 건넸던 시간인 낮이 아니라, 어둑어둑한 밤하늘이 가라앉아 있었다. 셀린 송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이 어린아이들이 24년 동안 그 골목에서 제대로 된 안녕을 위해 기다렸기에 밤으로 시간대를 설정하였으며, 그래서 이 순간 드디어 서로에게 제대로 된 안녕을 건넬 수 있었다. 그렇기에 노라는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으며, 다시 우측으로 걸음을 걸으며 서른여섯 살의 노라 문으로 돌아와 아서에게 안긴다”고 답했다. 즉, 노라는 결국 문나영을 끌어안게 되고, 문나영이 사랑했던 해성을 떠나보냄과 동시에 이뤄지지 않은 인연과 이루어진 인연의 깊이와 무게에 슬퍼하고 안도함으로써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인연'이라는 단어 두 글자는 영어에 존재하지 않기에, 셀린 송 감독은 전생이라는 소재를 통해 팔천 겁의 인연이 두 사람의 옷깃 사이에 스며든다는 점과, 모든 사람들이 우리들의 삶 속에 스쳐 지나가면 곧 인연이 된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팔천 겁의 인연을 통해 맺어진 부부의 연을 찬미하지 않는다. 비록 부부의 연이 아닐지라도 그 모든 인연은 언젠가, 다른 생에서도 다른 형태로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그 모든 인연에는 만남과 이별이 있음을 이해하며 이를 존중할 수 있기를. 그리고, 헤어짐의 순간에 상대방에게 평안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작별을 건네기를 소망한다. 결국 우리는 인연과 맞닿은 그 ‘우연의 순간’ 을 충실히 살아나가야 하며, 그 모든 우연은 우연이 아니었기에 실연의 비통에 빠지지 말고,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수 많은 아름다운 퇴장과 그들이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심 어린 안녕을 건넬 수 있는 우리들의 모든 변화를 긍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모든 우연과 인연은 훗날,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