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기 암환자의 슬기로운 치병 생
어제(3.8일) 갈까 말까 고민 끝에 춘천으로 향했다.
목적은 딱 두 가지.
수호천사가 결혼 전 배 타고 가봤는데 괜찮았다는 청평사 가는 것.
두 번째는 만자씨에겐 더 중요한 샘밭 막국수 먹는 것.^^
오후 세시쯤 출발. 1시간 20여 분 소요 예정.
선택의 기로에 섰다.
좀 늦었으니 밝을 때 청평사를 먼저 들르고 샘밭 막국수집을 갈 것인지,
배가 고프니 막국수를 먼저 먹고 운동 삼아 청평사 투어를 할 것인지.
두 장소가 가까우니 부지런히 먹고 운동 삼아 청평사 구경을 하는 게 좋겠다는 나의 주장이 먹혔다.
수호천사도 먹고 나서 운동 삼아 청평사 투어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동의했다.
아이들은 뭐.. 크게 관심이 없다. '니' 분들 맘대로 하셔요 분위기다.
원래 아이들은 닭갈비, 어른은 막국수를 각각 먹기로 했는데 아이들이 막국수 괜찮다고 합류했다.
네 명이 다 같이 샘밭 막국수집에 온 것은 처음이다.
순 메밀 100% 곱빼기 1개, 그냥 메밀 막국수 2개, 모둠전(감자전ㆍ녹두전) 1개, 보쌈 1개를 주문해 먹었다.
아들 녀석은 고기 킬러라 보쌈도 잘 먹었고, 딸은 국수보다는 전을 잘 먹었다. 아직 겨울인데 열무김치가 다시 등장해서 너무 반가웠다.
만자씨는 곱빼기를 게눈 감추듯 먹었다. '메밀 100%'가 주는 안도감이 상당하다. 수호천사의 눈치를 덜 봐도 된다.
맛있는 식사를 하고 10여 분 운전해 청평사에 도착했다. 조금 늦은 시간이라 우리 일행이 마지막인 듯했다. 주차하고 산길을 2~30분 올라가야 한단다.
"아빠 괜찮을까?"
"자기 무리하면 안 되는데.. 중간까지만 갈까?"
사실 만자씨도 자신이 없었다. 길이 제법 경사도 있고 늦은 오후라 날씨도 쌀쌀해졌고 최근에 몸도 아팠고 권총도 차고 있고..
"아니 갈 수 있어 가보고 싶어, 결혼 후 25년 만에 처음 온 건데. 천천히 가보자"
사실은 여기저기에 청평사 간다고 엄청 홍보를 해 놔서 반드시 가야 할 것 같았다.^^
경사가 심해 조금 힘이 들었지만 청평사 길은 너무 예뻤다. 겨울임에도 옆 계곡에 물이 제법 많았고 얼음이 녹아 흐르는 물소리가 너무 상쾌했다.
봄·여름·가을 어느 때 와도 좋을 것 같다.
중간쯤 올랐을 때 아들 녀석이 갑자기 뛰기 시작했다.
"왜 아들?"
"응, 내가 먼저 가볼게 얼마나 남았는지, 갈 수 있는지."
"ㅠㅠㅠㅠ"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어디서 저런 녀석이 나에게 왔을까.
한발 한발 천천히 산길을 올라가는데 아들 녀석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응, 조금만 더 가면 될 것 같아 아빠. 괜찮아?"
"-------------"
아들 녀석의 정성에 힘이 났고 마침내 청평사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천년고찰 다운 고즈넉함이 있었다.
스님 목탁소리가 너무 좋아 가족 모두 손을 모으고 기도를 했다. 어떤 기도들을 했을지는 불문가지다.
내려오는 길은 갑자기 어두워져 스산했다. 산이 이래서 무서운 거다. 그래도 혼자가 아닌 네 명이 오순도순 손잡고 내려오니 든든하고 뿌듯했고, 25년 묵었던 청평사 숙제를 마치니 홀가분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빠질 수 없어 요즘 춘천의 핫플로 자리 잡은 '춘천구봉산스타벅스 R점'을 찾았다.
거의 8시가 다 되었는데도 주차공간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춘천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야경은 일품이었다.
미안하게도 운전대는 아직 몸이 완전치 않은 수호천사가 잡았다. 내가 하겠다고 실랑이를 했으나 만자씨 건강이 우선이란다.
하루빨리 아이들 스파르타식 속성 훈련을 시켜 운전대를 맡겨야겠다.
날씨도 포근했고, 맛있는 막국수와 전도 먹고, 청평사 구경도 잘하고, 커피로 마무리까지.
그리고 안전하게 귀가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한 하루가 있을까 싶다. 면역력이 쭈욱 올라간 게 느껴진다.
어제 하루도 또 너무 감사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