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실천) 관계와 나를 재건하는 기술 (2) 자신

1장 신체 예산의 회복에 대하여

by 이병일

삶은 예측 불가능한 파도의 연속입니다. 어떤 파도는 잔잔한 물결처럼 우리를 부드럽게 흔들지만, 어떤 파도는 거대한 쓰나미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덮쳐옵니다. 우리는 그 파도를 온몸으로 맞이하며 때로는 견뎌내고, 때로는 부서집니다. 특히 예기치 못한 큰 시련이나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는 우리 몸과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을 흔들어 놓습니다. 저는 이 챕터에서 그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일으켜 세우고 무너진 마음의 기반을 다시 다질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It's not your fault”: 껍질을 깨는 진실의 무게

영화 <굿 윌 헌팅>에는 제 마음속에 깊이 각인된 명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만 과거의 상처 속에 갇혀 방황하는 윌(맷 데이먼 분)과, 그의 마음을 열어주려는 심리학 교수 션(로빈 윌리엄스 분)의 대화입니다.


윌은 세상의 모든 학문을 암기하고 복잡한 수학 난제를 순식간에 풀어내지만, 정작 자신의 상처 앞에서는 무력한 아이에 불과합니다. 그는 타인이 자신을 버리기 전에 먼저 타인을 밀어내기 위해 '지적 오만함'이라는 단단한 껍질 속에 숨어 지냅니다. 션은 윌의 그 껍질 밑에 깔린, 어린 시절 학대로 점철된 '생존의 공포'를 읽어냅니다. 션은 윌에게 다가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반복합니다.


“It's not your fault(네 잘못이 아니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윌은 “알아요(I know)”라고 냉소적으로 대꾸합니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는 뜻이죠. 하지만 션은 멈추지 않습니다. 윌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예닐곱 번을 거듭해서 말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마침내 윌의 방어기제가 무너져 내립니다. 그는 션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음을 터뜨립니다. 지식이라는 방패로 가리고 있던 '자책'과 '수치심'이 눈물과 함께 씻겨 내려가는 순간입니다.


큰 시련을 겪은 이들의 마음속에는 종종 윌처럼 '내가 더 잘했더라면', '나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 아닐까'라는 깊은 독버섯이 자라납니다. 그 자책은 회복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윌이 션의 위로를 통해 비로소 자기 자신과 화해했듯, 우리에게도 “그 모든 일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선언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고통의 연대기 속에 갇힌 시계를 다시 돌리는 회복의 신호탄이기 때문입니다.


“I got nowhere else to go”: 극한의 기합과 평화로운 거실의 대비

어느 일요일 밤, 와이프는 세 살 된 연우를 재우다가 함께 잠이 들었습니다. 방문 틈으로 새어 나오는 은은한 조명 아래, 서로를 꼭 닮은 모습으로 '3'자 모양을 그리며 마주 보고 곤히 자는 모녀의 숨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세상의 모든 근심이 휘발된 듯한 그 고요함 속에서, 저는 낡은 카키색 빈백 쇼파에 몸을 맡겼습니다.


리모컨을 돌리다 멈춘 곳은 EBS에서 방영 중인 고전 영화 <사관과 신사>였습니다. 젊은 시절 리처드 기어의 날 선 눈빛이 평화로운 거실의 공기와 묘한 대조를 이루더군요. 영화 속 잭 메이어는 윌 헌팅과 닮은 꼴입니다. 그는 오직 소위 임관이라는 목표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하며, 동료를 경쟁자로만 여기는 지독한 개인주의자입니다.


교관 폴리는 그런 잭의 오만함을 부수기 위해 그를 진흙탕 속에 처박습니다. 비가 쏟아지는 연병장에서 끝을 알 수 없는 기합이 이어집니다. 교관의 고함과 잭의 거친 숨소리가 뒤섞인 그 처절한 현장은, 제가 앉아 있는 푹신한 빈백 쇼파의 안락함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제 복부 근육까지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퇴교해! 이 쓰레기 같은 놈아! 당장 나가!” 교관의 압박이 극에 달한 순간, 잭은 진흙 범벅이 된 얼굴로 절규합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갈 곳이 없단 말입니다! (I got nowhere else to go!)” 그것은 강한 척하던 가면이 벗겨진, 잭의 생애 가장 취약하고도 진실된 순간이었습니다. 거실의 정적 속에서 그 대사를 듣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회복되는 지점은 바로 저 밑바닥,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솔직하게 인정하는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는 것을요. 잭은 그날 이후 더 이상 기록에만 집착하지 않고, 장애물 코스에서 뒤처진 동료를 돕기 위해 자신의 기록을 포기하는 진짜 '신사'로 거듭납니다.


뇌의 경이로운 재설계: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의 마법

잭 메이어나 윌 헌팅처럼 사람이 완전히 변하는 것이 정말 가능할까요? 현대 신경과학은 이에 대해 아주 희망적인 답변을 내놓습니다. 바로 ‘신경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는 개념입니다.


과거에는 성인의 뇌가 고정된 회로판 같다고 믿었지만, 2000년 런던 대학교의 엘리너 매과이어(Eleanor Maguire) 교수는 이를 뒤집는 유명한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바로 ‘런던 택시 기사 연구(The Knowledge)’입니다. 런던의 복잡한 미로 같은 길 2만 5천 개를 통째로 외워야 하는 택시 기사들의 뇌를 조사했더니, 공간 기억을 담당하는 ‘해마(Hippocampus)’의 크기가 일반인보다 유의미하게 커져 있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경력이 오래될수록 그 부위는 더 발달해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 뇌가 경험과 훈련에 따라 물리적 구조까지 바꿀 수 있는 ‘근육’과 같다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신경가소성은 우리가 고통스러운 과거의 회로에 영원히 갇혀 있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의 헌법’과 같습니다. 뇌과학자 마이클 메르제니치(Michael Merzenich)는 “우리 뇌는 평생 동안 재설계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스트레스와 상처로 인해 망가진 뇌를 가지고 있더라도, 새로운 경험과 의식적인 훈련을 통해 건강한 신경망을 다시 구축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공포 지대(Fear Zone)에서 학습 지대(Learning Zone)로

회복탄력성의 뇌과학(The Neuroscience of Resilience)에서 저자 아디티 베루카 박사 (Dr. Aditi Nerurkar)는 신경가소성 개념을 활용하여 스트레스로 인해 편도체 중심의 ‘공포 지대(Fear Zone)’에 갇힌 뇌가 어떻게 ‘학습 지대(Learning Zone)’로 옮겨갈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공포 지대의 고립 : 만성 스트레스 상태에서 우리 뇌는 편도체가 지배하는 ‘공포 지대’에 머뭅니다. 이곳에서는 오직 생존(Fight-or-Flight)만이 목적이기에, 창의성이나 회복을 위한 고등 사고가 중단됩니다. 잭 메이어가 동료를 공격하고 이기적으로 굴었던 것은 그가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뇌가 ‘공포 지대’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환의 신호 - 명명하기(Naming it) : 이 지대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이 공포 지대에 있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정신의학자 다니엘 시겔(Dan Siegel)은 이를 “Name it to tame it(이름 붙여 길들이기)”라고 부릅니다. 잭 메이어가 “갈 곳이 없다”고 소리친 것은, 자신의 두려움을 직면하고 이름 붙인 행위였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순간, 편도체의 폭주는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학습 지대로의 안착 : 학습 지대는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되어 새로운 대처 방식을 배우고 회복을 도모하는 곳입니다. 영미권의 한 참전 용사는 외상 후 스트레스(PTSD)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미세 습관(Micro-habits)’ 전략을 사용했습니다. 거창한 회복이 아니라 ‘매일 아침 침대 정리하기’, ‘5분간 숨 고르기’ 같은 작은 성취를 통해 뇌에 “나는 안전하며, 내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입니다. 이런 작은 성공들이 쌓여 뇌는 공포의 회로를 지우고 회복의 신경망을 강화합니다.


베루카 박사는 우리가 스트레스를 경험할 때 뇌의 편도체가 과활성화되어 “fight, flight, or freeze” 반응에 집중하게 되며, 이 상태에서는 학습이나 창의적인 사고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연구와 임상 경험을 바탕으로, 의식적인 노력과 훈련을 통해 이러한 신경 경로를 재구성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특히 그녀는 “스트레스 내성(stress-hardiness)”을 기르는 것에 주목하며 5가지 회복탄력성 리셋 방식을 제안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명확히 파악하라 (Clarify what’s most important)

시끄러운 세상에서 평정을 찾아라 (Find peace in a noisy world)

너의 몸과 마음을 동기화하라 (Sync your mind and body)

신경 회로를 진정시켜라 (Calm your circuits)

최고의 자아를 찾아라 (Be your best self)


이러한 단계들을 통해 우리는 편도체가 지배하는 공포 지대에서 벗어나, 전전두엽 피질이 활성화되는 학습 지대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이는 스트레스에 대한 반응 방식을 변화시키고, 뇌의 구조와 기능을 긍정적으로 재구성하여 저항력을 높이는 실질적인 훈련입니다.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무기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만성 스트레스의 터널을 지나오며 저만의 회복 무기들을 찾았습니다. 그 무기들은 다름 아닌 체력 관리, 충분한 휴식, 든든한 지지자들, 그리고 독서였습니다.


가장 먼저 저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바닥난 체력이었습니다. 아무리 쉬어도 개운하지 않고, 작은 활동에도 쉽게 지쳤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꾸준히 걷고,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며 굳어진 몸을 풀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걷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작은 노력이 쌓여 체력이 조금씩 회복되자 마음에도 활력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단단해지자 정신도 덩달아 강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휴식’에 대한 개념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전에는 쉬는 것이 ‘게으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휴식이 곧 회복이며, 다음 도전을 위한 필수적인 ‘재충전’임을 깨달았습니다. 온전히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시간. 이 모든 휴식의 순간들이 저의 바닥난 신체 예산을 다시 채워주었습니다.


또한, 제 곁에는 저를 믿고 지지해주는 든든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던 영화 속 션 교수처럼, 제 이야기를 아무런 판단 없이 들어주고 응원해주는 가족, 친구들 그리고 동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지지 속에서 저는 비로소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서는 저의 세상을 넓혀주고 새로운 관점을 선물해주었습니다. 책 속에서 만난 수많은 지혜와 경험들은 제가 갇혀 있던 생각의 틀을 깨고, 문제 너머의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특히 뇌과학, 심리학 관련 서적들은 저의 상태를 이해하고 스스로를 회복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사관과 신사>의 잭 메이어가 한 번의 절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이후의 고된 훈련과 동료들과의 부대낌이 그의 뇌를 재구성했을 것입니다. 회복은 드라마틱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의 ‘습관’입니다. 우리의 뇌는 변화할 수 있고, 우리는 그 변화를 만들어갈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며, 회복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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