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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로 만나게 될 줄이야]

08. 다섯번째 항암치료와 그 이후

by 아피탄트

2023년 9월 22일(다섯번째 항암)


채혈 & 피검사 결과


진료 예약 시간은 9시.

오전 7시에 병원에 도착해 채혈을 했다.

한시간 정도 지난 후 검사 결과가 나왔고, 병원 어플로 확인을 해봤다.


호중구 수치(ANC)는 이번에도 2079로 정상 수치가 나왔다.

지난 항암 때 많이 올랐던 간수치(AST)도 30으로 직전(79)에 비해 두 배 이상 떨어져 정상 수치(40 이하)로 돌아왔다.


혈액 검사 결과만 보면 아픈 사람인지 모를 정도인 거 같아 다행이다.



항암제 투여 전 진료


우선 중간평가 결과를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저번 글 [행운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거였다]에 담아두었습니다.)


이어서 다시 시작된 교수님과의 대화.


"저번 치료 기간에 불편한 건 없었나요?"


"지난 항암 때 구역감으로 고생을 했어요. 항구토제를 추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메토클로프라미드(metoclopramide) 성분의 맥페란을 처방해주시면 안될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주사제와 경구제 다 처방해드릴게요."


(사실 항구토요법 가이드라인 상으로는 메토클로프라미드보단 스테로이드를 우선 사용하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스테로이드는 아무래도 불면이나 체중 증가, 부종 등의 가능성이 있기에 그냥 맥페란을 처방해달라고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서도 큰 문제 없을 거라 판단하셨는지 별 고민 없이 처방을 내주셨다.)



환자로 만나게 될 줄이야


저번 항암부터 항구토제 중 하나를 주사제에서 경구제로 바꿨기에, 병원 내 약국에서 약을 수령해서 치료실로 가져가야 했다.

약국 앞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어 약을 수령하러 갔는데, 건네주는 약사의 이름과 얼굴이 너무 낯이 익었다.


내가 졸업한 약대는 '파밀리'라고 하는,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그룹이 있었다.

각 학번에서 2~3명씩, 그리고 지도 교수님 한 분 씩을 묶어 'XXX교수님 파밀리'가 되는 형식이다.


다시 돌아와서, 그 약사는 한 학번 위의, 같은 파밀리였던 선배님이었다.

친하게 지내거나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고 오가다 만나면 인사는 하는, 그 정도의 사이였다.


모를 리 없었지만 나를 몰라주길 바랐다.

비니를 쓰고 눈썹이 없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어딘가 아픈 사람이었다.

게다가 내가 수령하는 약은 오직 항암치료를 하는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약물이니까,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모를 수 없었다.


2~3년 전만 해도 그냥 선후배였는데 오늘은 약사 대 환자, 그것도 암환자로 만나게 될 줄이야, 내 모습이 더 측은해졌다.

약업계는 참 좁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약을 받는데, 참 감사하게도 모르는 척을 해주었다.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N명의 환자 중 한 명처럼 날 응대해줬다.


아마 그게 최대한의 배려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껏 예민해져 있던 내가, 그 어떤 당황스러움도 감지하지 못했다.

실제로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정말 몰랐던 건지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저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 된 게(그렇게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게) 참 고마웠다.


언젠가 만나게 되는 날이 있다면 꼭 물어봐야지, 그리고 고마웠다는 말도 꼭 전해줘야지.



B는 빠지고, 이제 AVD로


그런 감정의 격변(?)을 겪으며 약을 수령한 후에 치료실로 갔다.

처음 치료계획을 들을 때 세번째 주기부터는 폐에 무리가 갈 수 있는 B는 빼고 AVD로 진행한다고 설명을 들었는데, 그 계획대로 이번엔 AVD 세 가지 약물만 투여를 받았다.


물론 시작은 항구토제.

지난 항암치료에 사용했던 2종의 항구토제(팔로노세트론, 아프레피탄트)에 더해 메토클로프라미드(맥페란) 주사까지 총 3종류의 항구토제를 사용하게 되었다.


항구토제가 다 들어가고 나선 A와 V, 이어서 D의 순서로 주사를 맞았다.

주입 속도가 자꾸 늦어져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D도 꽤 빨리 들어가 10시부터 시작한 주사가 2시 무렵에 끝났다.

지금까지의 항암 중에 가장 빨리 끝난 회차가 되었다.



2023년 9월 23일~24일


마찬가지로 주사 후 2일, 3일차까지는 기상 후 항구토제 복용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번에도 구역감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지난 회차보단 훨씬 괜찮았다.

항암제 한 가지가 빠진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추가한 항구토제도 효과가 있었겠지.

그럼에도 약효가 떨어질 밤 무렵이 되면 구역감이 좀 심해진다.


다른 특별한 부작용은 없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몸이 더 지치는 것 같다.

몸의 문제인지 마음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잘 견뎌내고, 잘 이겨내려고 마음을 다잡는 수밖엔 없다.



2023년 10월 4일


케모포트를 삽입하는 날.

오른쪽 쇄골 아래쪽에 약물을 주입하는 둥근 판을 삽입한다.

시술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끝나있었고, 이후 지혈을 하느라 30분 정도 더 모래주머니를 대고 누워있었다.


아프다는 후기를 많이 봐서 걱정을 좀 했지만, 나한테는 그냥 뻐근한 정도였다.

마취할 때 좀 뻐근하더니 삽입술을 할 때는 별 느낌이 없었고, 마취가 풀리니 다시 뻐근해지는 정도였다.


케모포트는 정맥 중에서도 직경이 넓은 중심정맥관으로 약물이 바로 주입되도록 하는 장치이기에, 크기가 작은 혈관으로 약물을 투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혈관통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나를 괴롭혀온 혈관통과 이별이라는 생각을 하니, 오른쪽 가슴 위에 툭 튀어나온 게 불편하면서도 안심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먼데, 난 잘 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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