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다섯번째 항암치료와 그 이후
진료 예약 시간은 9시.
오전 7시에 병원에 도착해 채혈을 했다.
한시간 정도 지난 후 검사 결과가 나왔고, 병원 어플로 확인을 해봤다.
호중구 수치(ANC)는 이번에도 2079로 정상 수치가 나왔다.
지난 항암 때 많이 올랐던 간수치(AST)도 30으로 직전(79)에 비해 두 배 이상 떨어져 정상 수치(40 이하)로 돌아왔다.
혈액 검사 결과만 보면 아픈 사람인지 모를 정도인 거 같아 다행이다.
우선 중간평가 결과를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한 내용은 저번 글 [행운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찾아내는 거였다]에 담아두었습니다.)
이어서 다시 시작된 교수님과의 대화.
"저번 치료 기간에 불편한 건 없었나요?"
"지난 항암 때 구역감으로 고생을 했어요. 항구토제를 추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메토클로프라미드(metoclopramide) 성분의 맥페란을 처방해주시면 안될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주사제와 경구제 다 처방해드릴게요."
(사실 항구토요법 가이드라인 상으로는 메토클로프라미드보단 스테로이드를 우선 사용하는 게 원칙이긴 하지만, 스테로이드는 아무래도 불면이나 체중 증가, 부종 등의 가능성이 있기에 그냥 맥페란을 처방해달라고 말씀드렸다.
교수님께서도 큰 문제 없을 거라 판단하셨는지 별 고민 없이 처방을 내주셨다.)
저번 항암부터 항구토제 중 하나를 주사제에서 경구제로 바꿨기에, 병원 내 약국에서 약을 수령해서 치료실로 가져가야 했다.
약국 앞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다 내 차례가 되어 약을 수령하러 갔는데, 건네주는 약사의 이름과 얼굴이 너무 낯이 익었다.
내가 졸업한 약대는 '파밀리'라고 하는, 선후배 간의 친목 도모를 위한 그룹이 있었다.
각 학번에서 2~3명씩, 그리고 지도 교수님 한 분 씩을 묶어 'XXX교수님 파밀리'가 되는 형식이다.
다시 돌아와서, 그 약사는 한 학번 위의, 같은 파밀리였던 선배님이었다.
친하게 지내거나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존재는 알고 있고 오가다 만나면 인사는 하는, 그 정도의 사이였다.
모를 리 없었지만 나를 몰라주길 바랐다.
비니를 쓰고 눈썹이 없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어딘가 아픈 사람이었다.
게다가 내가 수령하는 약은 오직 항암치료를 하는 사람에게만 사용하는 약물이니까, 내가 어떤 상황인지를 모를 수 없었다.
2~3년 전만 해도 그냥 선후배였는데 오늘은 약사 대 환자, 그것도 암환자로 만나게 될 줄이야, 내 모습이 더 측은해졌다.
약업계는 참 좁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약을 받는데, 참 감사하게도 모르는 척을 해주었다.
아주 프로페셔널하게 N명의 환자 중 한 명처럼 날 응대해줬다.
아마 그게 최대한의 배려라 생각하지 않았을까.
한껏 예민해져 있던 내가, 그 어떤 당황스러움도 감지하지 못했다.
실제로 어떤 마음이었는지, 아니면 나를 정말 몰랐던 건지 내가 알 도리는 없지만, 그저 수많은 환자 중 한 명이 된 게(그렇게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게) 참 고마웠다.
언젠가 만나게 되는 날이 있다면 꼭 물어봐야지, 그리고 고마웠다는 말도 꼭 전해줘야지.
그런 감정의 격변(?)을 겪으며 약을 수령한 후에 치료실로 갔다.
처음 치료계획을 들을 때 세번째 주기부터는 폐에 무리가 갈 수 있는 B는 빼고 AVD로 진행한다고 설명을 들었는데, 그 계획대로 이번엔 AVD 세 가지 약물만 투여를 받았다.
물론 시작은 항구토제.
지난 항암치료에 사용했던 2종의 항구토제(팔로노세트론, 아프레피탄트)에 더해 메토클로프라미드(맥페란) 주사까지 총 3종류의 항구토제를 사용하게 되었다.
항구토제가 다 들어가고 나선 A와 V, 이어서 D의 순서로 주사를 맞았다.
주입 속도가 자꾸 늦어져서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던 D도 꽤 빨리 들어가 10시부터 시작한 주사가 2시 무렵에 끝났다.
지금까지의 항암 중에 가장 빨리 끝난 회차가 되었다.
마찬가지로 주사 후 2일, 3일차까지는 기상 후 항구토제 복용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번에도 구역감이 아예 없진 않았지만, 지난 회차보단 훨씬 괜찮았다.
항암제 한 가지가 빠진 것도 영향이 있었을 것이고, 추가한 항구토제도 효과가 있었겠지.
그럼에도 약효가 떨어질 밤 무렵이 되면 구역감이 좀 심해진다.
다른 특별한 부작용은 없지만, 회차가 진행될수록 몸이 더 지치는 것 같다.
몸의 문제인지 마음의 문제인지는 잘 모르겠다.
잘 견뎌내고, 잘 이겨내려고 마음을 다잡는 수밖엔 없다.
케모포트를 삽입하는 날.
오른쪽 쇄골 아래쪽에 약물을 주입하는 둥근 판을 삽입한다.
시술은 생각보다 금방 끝났다.
20분 정도가 지나자 끝나있었고, 이후 지혈을 하느라 30분 정도 더 모래주머니를 대고 누워있었다.
아프다는 후기를 많이 봐서 걱정을 좀 했지만, 나한테는 그냥 뻐근한 정도였다.
마취할 때 좀 뻐근하더니 삽입술을 할 때는 별 느낌이 없었고, 마취가 풀리니 다시 뻐근해지는 정도였다.
케모포트는 정맥 중에서도 직경이 넓은 중심정맥관으로 약물이 바로 주입되도록 하는 장치이기에, 크기가 작은 혈관으로 약물을 투여할 때 발생할 수 있는 혈관통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부터는 나를 괴롭혀온 혈관통과 이별이라는 생각을 하니, 오른쪽 가슴 위에 툭 튀어나온 게 불편하면서도 안심이 된다.
그래도 여전히 갈 길이 먼데, 난 잘 해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