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 1교를 받았다
금요일에 출판사에서 원고 1교를 받았다. 이번 주에 다시 읽고 19일 금요일까지 보내달라는 메일이었다. 슬슬 걱정이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내 원고를 다시 보고 조금 더 고칠 수 있어 좋으면서도 또 모두 갈아엎고 싶을까 봐 겁이 났다.
장편 제목이 [토성의 아이들은 권태로 달을 깎고]인데, 출판사에서 다른 제목 안을 물어왔다. 아무래도 너무 길거나 시적이거나, 둘 다인 것 같다.
몇 번을 돌아봐도 나는 이 제목이 제일 좋은데, 나에겐 글 친구가 많지 않아 의견을 물을 곳이 없다.
진숙이와 장난처럼 이런저런 제목을 떠올려보긴 했지만, 그냥 원제가 낫다는 결론이 나왔다. 진숙이는 중학교 교회친구다. 그때 나는 임원회 부회장이었고 진숙이는 총무였다. 나는 이제 무교이고 진숙이는 여전히 크리스천이고 총무다. 나는 요새 반야심경 재즈에 빠져있고 피아노를 치는 스님이 너무 잘생기고 목소리도 좋아 진숙이에게 추천했고 그녀는 내게 찬송가 재즈를 추천하며 나를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조카에게도 몇 개의 제목을 던져주고 물었는데, 원제가 좋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냥 원제로 밀고 나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
저번 주부터 다시 운동을 시작했는데, 그래서인지 너무 피곤하다. 살은 계속 찌고 일은 많고 그런데 또 살도 빼야겠고 배는 고픈... 그런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어릴 때 나는 정말 말랐었는데, 그때는 이렇게 살이 붙을 줄 몰랐다. 그때 어떤 점쟁이를 만난 적이 있다. 물 한 잔을 줬을 뿐인데, 내 미래를 점쳤던 그 점쟁이는 지금 내 나이와 비슷했던 것 같다. 이마에 흐른 땀을 손등으로 훔치던 그녀는 무척 고단하고 지쳐 보였다. 입가에 묻은 물을 훔치며 그녀는 그때 오랫동안 사귀던 사람과는 잘 안 될 거고 나는 마흔이 넘으면 살이 찔 거라고 했다. 당시에는 물 한 잔의 값으로 과분한 점사라 웃고 넘겼는데, 지나고 보니 그녀는 용한 점쟁이였다. 어쩌면 그녀는 마녀가 아니었을까. 어떻게 그런 걸 점사로 줄 수 있지?
그녀의 저주처럼 그 사람과는 잘 안 됐고 마흔도 되기 전에 살이 쪘다.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한글학교에 갔다가 루이는 친구 생일 파티에 가고 우린 운동을 갔다가 시내에 토요 마켓에 갔다. 이 날은 정말 이상했는데, 우리가 네덜란드어로 묻는데 모두 영어로 답했다. 다시 이방인이 된 것 같았다.
"오늘은 진짜 이상하네. 낯선 곳에 있는 것 같아."
라파엘은 잔뜩 산 과일을 낑낑대며 품에 안았다. 싼값의 채소와 과일을 포기할 수 없어 욕심껏 사들고 차까지 걸었다. 주차비를 아끼려 시내 밖에 차를 세웠기 때문에 무거운 걸 들고 오래 걸었다. 오는 길에 폴란드 커플이 시내에서 주차권을 사느라 기계 앞에서 실랑이하는 게 보였다. 라파엘에게 폴란드 사람들이라고 도와주라고 그의 옆구리를 툭 쳤다. 그는 물건을 내려놓고 걸어가 영어로 주차 앱을 알려줬다.
"이게 더 싸요?"
루이뷔통 지갑을 여닫으며 그녀가 물었다. 그들의 차는 BMW 신형이었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이었는데, 그녀가 몇 유로 아끼려고 그런 질문을 하니 좀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은 다시 돌아와 과일을 껴안았다. 과일 무게 때문에 봉지가 끊어져서 어쩔 수 없었다.
"폴란드어로 알려주지."
"영어가 편해."
영어가 편한 라파엘은 폴란드에서도 자주 "너는 폴란드어를 아주 잘하는구나. 어디서 배웠니?"라는 말을 듣곤 한다. 그의 폴란드어는 모국어와 외국어 사이에 있다. 그리고 나의 한국어도 그럴지 모르겠다. 언니도 요새 자주 내 말을 알아듣기 어렵다고 하는데, 진숙이는 언니가 이제 귀가 먹어서 그런 거라고 자기는 내 말 알아듣는데 문제없다고 위로했다. 그런데 진숙이는 나보다 더 유럽에서 오래 살았고 우린 자주 각자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잘 웃는다.
한참을 걸어 차에 도착하니 루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었다. 마침 폴란드 마켓이 있는 곳이라 들러 이것저것을 고르니 백 유로가 넘게 나왔다. 우리는 한국 마켓, 로컬 마켓, 폴란드 마켓에서 장을 본다. 각각 필요한 게 다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여기선 내가 요리사다. 다른 사람이 나 대신 요리사가 될 수 없어서 슬프다. 그래서 요샌 파업이라는 걸 나도 좀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돌아와 저녁을 먹고 치우고 커피 한 잔을 하고 드라마 한 편을 보니, 늦은 밤이었다. 브런치 스토리를 기웃거리며 이웃들의 글을 읽고 어떤 글에서는 뛰어난 전문성에 놀라기도 하면서, 속으로는 조금만 있다가 작업해야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빨래를 개고 다음 주에 조카가 오니까 집을 좀 정리해야 하는데 싶어, 어질러진 물건을 좀 정리했다. 주택으로 이사 온 후에 우리는 항상 공사 중이다. 마지막 층을 루이 방으로 꾸미고 있는데, 일 년째 제자리다. 조카가 오기 전까지 끝내고 싶은데, 그러면 글을 쓸 수가 없다. 아무래도 조카를 독일에 데려다주고 와서 천천히 해야 할 것 같다.
조카가 이번 시월부터 독일에서 유학을 하게 됐다. 집에서 6시간 거린데, 챙겨갈 게 많다. 침대보와 베개, 수건 같은 자잘한 것들도 모두 챙겨줘야 한다. 기숙사에 들어가게 돼서 다행인데, 그래도 이모로서 할 일이 많다. 오면 또 놀아도 줘야 하고...
주말에 판테는 외롭다. 평일에는 엄마가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주말에는 모두 밖에 나가고 없다. 집에 들어오면 안겨서 '아가아가'를 꼭 해야 한다. 내가 "판테, 아가아가 놀이할까?" 그러면 느릿느릿 내게 다가온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장편을 9월 말까지 끝낼 수 있을까... 그래도 끝까지 해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