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마지막
요니는 자신의 찻잔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아델라와 루프스는 여전히 벽난로 앞에 서 있었다. 루프스의 팔이 다정한 연인처럼 아델라의 어깨를 감쌌다. 요니는 찻잔을 들고 그들 뒤에 섰다. 겨우 한 발짝 정도 거리였지만, 아델라와 루프스는 요니의 존재 자체를 잊은 듯했다. 루프스의 갈색 눈동자는 아델라를 향해 있었다.
당신들…… 충분히 알아들었어요.
찻잔을 탁자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으며 요니가 낮고 차가운 소리를 냈다. 찻잔에서 튄 물이 탁자 위에 방울졌다.
당신과 아델라, 다 알아들었다고요!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크리넥스를 뽑아 물방울을 닦으며 요니가 소리쳤다.
당신, 이 사진…….
뒤돌아선 루프스가 벽난로 위에 액자를 가리켰다.
사진?
요니가 되물었다. 아델라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요니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다. 루프스가 요니를 노려보는 동안에도 아델라는 가련하고 안쓰러운 이혼녀가 되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내가…… 치워달라고 부탁했잖아.
루프스, 그러지 마.
아델라가 루프스의 팔을 잡았다. 아델라는 울고 있었다. 아름다운 초록색 눈동자도 붉게 충혈돼 있었다. 그제야 요니는 벽난로 위에 아론의 사진을 모두 치워달라던 루프스의 부탁이 떠올랐다. 그때 요니는 고기 속에 말린 자두를 넣는 중이었다. 손은 미끄러웠고 루프스의 말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요니는 으레 그렇듯 탁탁, 이라고 두 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케이크 반죽을 빚고 초콜릿을 중탕하는 동안 잊어버렸다.
치우려고 했는데…….
요니는 낮에 액자를 만지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본 것처럼 그 옹종한 마음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 잊은 게 아니다. 요니의 뺨이 발그레 붉어졌다. 요니는 아론과 아델라, 루프스가 함께 있는 사진을 만지던 자신의 마음이 루프스에게 읽히는 것만 같아 부끄러웠다. 그 무너진 균형이 손에 잡히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 요니. 먼저 가볼게.
아델라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가늘고 창백한 손이 떨리는 걸 요니는 멍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거꾸로 들린 가방 속에 물건들이 카펫 위로 쏟아졌다. 볼펜과 낙타 가죽으로 된 다이어리(요니가 생일 선물로 준 거였다)와 핑크색 포장지로 싸인 상자가 전부였다. 요니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집어 드는 아델라를 노려봤다. 아니 상자를 노려봤다.
아까 주려고 했는데, 음식이 너무 맛있어서 잊고 있었어.
아델라가 핑크색 상자를 탁자 위에 놓으며 웃어 보였지만, 붉으락푸르락한 얼굴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한 아이 같았다.
밸런타인데이 선물이야, 요니.
아델라는 빠르게 중얼거린 후, 뒷걸음질 쳐 현관 앞까지 갔다. 요니는 아델라에게 고맙다고 해야 하는지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지 몰라 미적댔다.
그럼, 다, 다음에 봐.
아델라가 코트를 집어 들고는 밖으로 달려 나갔다. 아델라를 좇아가려는 루프스의 팔을 요니가 잡았다.
미안해요, 루프스.
당신, 당신……. 무슨 생각을 한 거야!
루프스가 요니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그의 몸은 아델라가 사라진 문을 향해 틀어져 있었다. 난로 옆 나무 의자에는 밑단이 젖은 아델라의 청바지와 붉은색 스웨터가 걸려있었다.
가지 마요, 루프스. 가지마…….
당신 정말!
부탁이에요. 나, 무서워요.
나중에 얘기해, 요니!
루프스는 아델라를 좇아 밖으로 뛰쳐나갔다. 열린 문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요니는 루프스를 따라 나가려다 벽난로 위에 놓인 아론의 사진을 들어 바라봤다. 그 중엔 요니가 찍은 사진도 있었다. 그 사진들 속에는 요니도 있었다. 요니는 나무 의자 위에 놓인 아델라의 청바지와 스웨터를 들어 종이가방에 담았다.
눈은 어느새 그쳤다. 하얀 눈 위에 아델라와 루프스의 발자국이 깊게 패 있었다. 때론 각각의 발자국으로, 때론 하나의 발자국으로.
요니는 아델라와 루프스의 발자국 위에 자신의 발을 겹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을 뗄 때마다 눈이 밀리며 뽀드득 소리가 났다. 요니는 멈춰 서서 뽀드득, 뽀드득 멀어지는 루프스와 아델라의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그녀가 걸어온 길을 돌아봤다. 거기에는 그들 세 사람의 발자국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깨끗하고 하얀 순백의 세상이었다. 처마 위에 쌓인 눈덩이가 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노란 가로등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아델라와 루프스의 발자국을 비췄다. 요니는 낯선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아이처럼 그 발자국을 멍하니 바라봤다. 퍽 소리를 내며 요니의 발 앞으로 눈덩이가 떨어졌다. 여기저기서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들렸다. 요니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봤다. 두 팔을 벌리고 올연히 선 예수의 얼굴을 푸른 조명이 비추고 있었다. (*)